남효온(南孝溫)의 마음의 차(茶)
남효온(南孝溫)의 마음의 차(茶)
  • 이창숙
  • 승인 2017.05.07 1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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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5>
올라온 찻잎, 첫차는 일창일기(一槍一旗)를 채취하여 만든다.

 곡우(4월20일)가 지났으니 차를 만드는 이들의 손이 한참 분주할 때이다. 곡우는 24절기 중 봄의 마지막 절기로 나무에 물이 가장 많이 오르는 시기이다. 그래서 차(茶)도 이 시기를 전후해 만든 것이 상품이다. 이때 쯤 비가 적당히 잘 내리면 차의 맛과 향도 일품이다. 올해 차 맛은 어떨지. 봄철 황사와 흙비가 내려 우려가 되지만, 차나무가 자라는 지역은 산속 청정지역이라 조금은 안심이다. 요즘 흙비는 환경오염으로 예견된 기후이지만 과거에는 흔치않은 천재지변이었다. 『성종실록』에 흙비에 대한 기록이 있다.

성종(成宗, 1457~1494) 9년(1478) 4월 1일 흙비가 내리자 놀란 어린 성종은 이는 “하늘이 꾸짖어 훈계하고자 함이니 분명 까닭이 있을 것이다. 어찌 그대들은 흙비에 대해 아무 말이 없소” 그러자 도승지 신준(申浚)을 비롯하여 신하들은 “날씨가 흐린 것만 보았지 흙비는 보지 못했다고 답변한다”. 성종은 이러한 재이(災異)는 분명 까닭이 있음이라 여기고 이를 밝혀 그치게 할 방도를 찾고자 하였다. 그는 “세금이 과했는지. 형벌이 적절치 못했는지. 사람을 등용하는데 잘못이 있었는지. 백성들이 혼인 할 시기를 잃었는지. 백성들이 고통 받는데 혹 알지 못했는지 등 여러 가지 폐단에 대한 직언을 듣고자 전지(傳旨)”를 내렸다. 물론 이 당시 성종의 속내도 있을 것이고 모르는 척하는 신하들의 속내도 있을 것이다. 여하튼 성종은 재이(災異)를 계기로 적폐(積弊)를 청산하고자 하였다. 즉 구언전지(求言傳旨)를 내려 소통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훈구공신들은 이러 저러한 이유만 늘어놓고 답변을 하지 않았다.

이때 생육신중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은 궁중의 여러 문제를 지적하고 ‘소릉복위(昭陵復位)’라는 상소를 올린다. 그러나 성종의 뜻과는 다르게 이 상소는 역모로 뒤바뀌게 되고, 그는 유랑생활로 나머지 삶을 보내야만 했다. 그의 비극은 그치지 않고 연산군 때에 그 상소로 인해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한다. 그의 아들 남충서 역시 참사를 당한다. 그 후 35년이 지난 중종 때 그가 주장한 ‘소릉복위’가 이루어진다. 후에 생육신들의 절의는 재평가 되지만, 4월에 내린 흙비를 계기로 정치개혁을 하고자 했던 성종의 뜻은 무산되고 남효온은 역적이 되어 유랑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남효온의 짧은 삶속에 차를 마시며 지은 시(詩)가 있다. 그는 평상시 술을 좋아했다고 한다. 술은 울분을 삼키기에 좋은 것이니, 세상 속에서 벗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의 병은 다스리지 못했던 것 같다. 이런 그가 차를 마시며 눈과 귀를 바로잡은 마음의 시이다. 십년동안 힘든 삶은 굶주림에 지쳐 배속에서 꾸룩 거리는 솔개의 울음소리 밖에 없었으니, 한 잔의 차로 그 마음을 씻고 화병을 달래지 않았을까.

“일찍이 세상에서 동서남북으로 내달렸으나,
십년동안 마른 배에 주린 솔개만 우는 구나.
아이 불러 차(茶) 달일 제, 저문 강물 차갑더니
나의 폐병 낫게 하여 마음의 화병(心火)이 가라앉네.
온갖 생각 가지런해지고 마음이 밝아지니
날마다 안석에 기대어 눈과 귀를 수렴하네.
동쪽 성문 밖에서는 옳고 그름을 다투지만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 귀에는 들리지 않네.”

햇 차를 알리는 차향이 남도에서 피어 온 나라에 퍼지고, 차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린다. 그간 쌓인 스트레스가 있다면 차향으로 씻어보면 어떨까 싶다.

/ 글 = 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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