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문가 교육사업 투자 우리나라 발전 원동력 됐죠”
“명문가 교육사업 투자 우리나라 발전 원동력 됐죠”
  • 이종호 기자
  • 승인 2017.04.06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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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창조 아카데미 제2기 CVO과정 제4강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
▲ 6일 저녁 7시 전북도민일보 6층 대강당에서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가 '호남의 명가'라는 주제로 비전창조 아카데미 특강을 하고 있다. 신상기 기자

 조윤선 전 장관만큼 모든 것을 갖춘 사람도 드물 것이다.

모친은 이대 약대를 나와 대한 약사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부친은 일찍부터 사업에 성공해서 재력으로는 부러운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타고난 집안배경에 빼어난 미인에다 겸손한 인간성까지 갖췄으며 사법고시를 패스할 정도로 뛰어난 지능까지 겸비했다.

하지만 어쩌다가 현재의 비참한 모습이 됐을까?

6일 전북도민일보 비전창조아카데미 2기 CVO 과정 3번째 강사로 나선 조용헌 건국대 석좌교수는 “조 전 장관이 3번이나 장관급에 임명되는 등 이번 정권에서 자신의 복을 바닥까지 다 긁어서 써버렸기 때문”이라며 “과거 조선시대 명문가에는 ‘정 3품 이상의 벼슬을 하지 않는다’는 가훈이 있을 만큼 우리조상들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길흉화복을 조절했다”고 밝히며 ‘호남의 명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시작했다.

그렇다면 호남의 명문가는 어디일까. 그리고 지금와서 우리가 왜 이들을 알아야 할까?

구한말 전주의 만석군 부자였던 백부자의 아들은 고종으로부터 백남신(白南信)이라는 이름을 직접 하사받았다.

아무리 부자지만 계급사회였던 당시 중인에 불과했던 백부자 가문에 임금이 직접 이름까지 지어 준 이유가 뭘까.

그 배경에는 대원군과 고종의 결재가 있었다. 대원군이 돈 없고 배고팠던 낭인으로 전국을 유랑하던 시절 전주에 들렀을 때, 이 백부자가 극진한 대접을 하면서 깊은 인연을 맺었고, 나중에 대원군이 정권을 잡고 경복궁 중건을 할 때 거액의 백부자가 거액의 기금을 내 놓았던 것이다.

경복궁 중건 기금을 내 놓으면서 백부자는 조선왕실로부터 3가지 특혜를 받았다.

첫째는 큰 저택을 지을수 있는 허락이었다.

둘째는 전라도에 근무하던 벼슬아치들이 임기를 끝내고 이임(離任)을 할 때 그 이임식 환송연을 백부자가 할 수 있는 권한이었다.

그래서 나온 말이 ‘전라도에 부임하는 관리들의 인사권은 백부자가 가지고 있다’라는 소문이었다.

셋째는 궁궐에서 필요한 물품을 납품하는 독점적 납품권을 백부자가 갖는 것이었다.

한일합방이후 백씨집안은 지금의 익산으로 옮겼지만 그곳에서도 큰 돈벌으며 현재는 사학의 명문으로 자리잡은 남성고등학교를 설립했다.

고종이 남쪽에서 믿을수 있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지어준 이름을 따서 남쪽의 별이라는 의미로 학교이름을 지은 것이다.

수학의 정석의 저자 홍성대 이사장도 이 곳 남성출신인 점을 볼 때 백씨집안의 교육사업에 대한 열정이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고려대학교를 설립한 인촌의 뒤에는 호남지방의 유력한 집안의 공동투자가 있었점을 볼 때 우리고장의 명문가는 유독 교육사업에 열중했다.

절대절명의 암흑기였던 일제 강점기. 우리고장의 명문가는 교육사업에 모든 것을 걸고 현재의 울분과 아쉬움을 삭히며 미래에 투자한 것이다.

이 같은 명문가문들의 노력이 오늘 우리나라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됐다고 조 교수는 진단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자손대대로 훌륭한 인재를 내며 명문가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어떤 집안의 자식들이 잘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사판적(事判的) 측면과 이판적(理判的) 측면으로 원인을 분석해 보면 우선 그 집안의 유전자가 어떤가를 살펴보고, 윗대에 얼마나 적선을 한 집안인가를 본다.

우선 어떤 교육을 받았나가 중요하다.

다음은 이판적 측면은 그 집안의 묘터와 집터가 어떤가, 해당 인물의 생년월일시가 어떤가, 태어날 때 태몽이 무엇인가를 짚어보는 것이다.

이판적 측면 가운데 보기 어려운 것이 그 집 조상들의 묘 터이다. 조상 뫼 자리를 중시하는 관습은 오로지 한국의 전통문화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풍습이다.

전주에서 서예가로 유명했던 석전(石田) 황욱(黃旭,1898-1993)의 7대조 조상은 조선후기 호남의 실학자였던 황윤석(黃胤錫,1729-1791)이었다.

구한말 흥선대원군이 황윤석이 지은 이수신편’(理藪新編)이라는 책을 애타게 찾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황윤석의 6대 후손은 집에 보관돼 있던 ‘이수신편’을 가지고 서울 운현궁으로 찾아가 바쳤고 순창 회문산(回文山)에 있는 명당인 오선위기혈(五仙圍碁穴)에 묘를 한자리 쓰는 것을 소원으로 청했다.

이집안의 조상이 명당에 묻히면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됐다.

석전은 오른손이 떨리는 수전증이 생기자, 손바닥에 붓을 쥐고 글씨를 쓰는 악필법(握筆法)을 개발했고, 80대 중반에 가서는 왼손으로 글씨를 쓰는 좌수악필(左手握筆) 서체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묘바람’때문인지는 몰라도, 자손 중에 여러 명의 교수와 박사들이 많다.

몇 년 전에 ‘송하비결’(松下秘訣)에 대한 해석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황병덕 박사도 이 집안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윗대에서 얼마나 적선을 베풀었냐는 것이다.

조 교수는 “인간이 죽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며 “자신의 유전자를 갖고 태어나서 살아가는 후손들이 잘살고 못사는 것은 남들에게 얼마나 베풀었나의 정도에 따라 판가름이 난다”고 강조하며 이날 강의를 마쳤다.

이종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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