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지 못할 제주 4ㆍ3사건
잊지 못할 제주 4ㆍ3사건
  • 고재흠
  • 승인 2017.04.02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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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 4ㆍ3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극심했던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양민들이 무고하게 희생되었을 뿐 아니라 막대한 재산상의 손실을 야기함으로써 제주도민 전체가 직ㆍ간접적으로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입었다.

제주 4ㆍ3 사건은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해방된 직후, 미군이 한반도의 38선 이남 지역을 점령해 통치하던 미 군정기에 발발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까지 7년 7개월 동안 이어온 사건이다.

이 사건의 발단은 8ㆍ15광복 이후 남한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5ㆍ10 총선거를 저지하고 통일공산국가를 세우기 위해 1948년 4월 3일 새벽, 남로당 제주도당 골수당원 김달삼 등 350명이 무장을 하고 제주도내 24개 경찰지서 가운데 12개 지서를 일제히 급습하면서 시작되었다. 여기에 우익단체의 척결에 대한 제주도민들의 유언비어와 반감, 공포가 합해져 유혈사태는 급속도로 제주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이로 인해 제주 모든 지역의 행정기능이 마비됨은 물론 심각한 치안불안상태가 지속되었으며,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 되었다.

이승만이 불법적으로 선포한 계엄령에 따라 군ㆍ경 토벌대가 1948년 11월부터 약 4개월 동안 벌인 이른바 ‘초토작전’ 때 중산간마을 주민들이 치른 희생은 이루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지경이었다. 중산간 마을을 포위한 군인들은 집집마다 불을 붙였고, 불기운에 놀라 뛰어나오는 주민들을 젖먹이 아기에서부터 임산부, 장애인, 청소년, 청장년 70~80대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다. 7년 동안 무려 3만 여명이 희생된 것이다. 그 살벌한 과정에서 야수로 돌변한 토벌대에 의해 말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여성들의 성적 수난도 컸다.

1950년 6ㆍ25전쟁이 발발하자 학살극이 재연됐다. ‘예비검속’으로 1천여명과 전국 각지의 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약 2,500여명의 제주도민이 인민군에게 쫓기며 공황상태에 빠져 있던 이승만 정권에 의해 집단 학살당했다.

경찰 발포에 항의해 대대적인 ‘민관 총파업’이 벌어졌다. 민간은 물론 대부분의 관공서가 파업에 돌입했고, 심지어 제주출신 경찰들까지 파업에 동참했다. 그런데 조병옥 경무부장 등 미군정 경찰은 관련자 처벌과 사과, 그리고 보상 등의 후속조치를 하기는커녕 ‘제주도는 붉은 섬’ 이라고 규정하면서 무차별한 검거 선풍을 일으켰다.

한편 제주도에 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1948년 10월 제9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부터 산악지대에 무허가 통행금지”를 포고했다. “만약 위반하는 자에 대해서는 폭도로 인정하여 총살에 처할 것”이라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조선일보 1948. 10. 20.)이를 어긴 자는 무차별 학살했다. 그런데 최근 송요찬의 고향인 청양군과 충청남도가 송요찬 선양비 건립사업을 추진하고 있어 4ㆍ3 유족과 제주도민들은 선양사업 철회를 요구하고 있다.

제주 4ㆍ3사건은 무려 7년 여 동안 전개되면서 시기에 따라 여러 국면들이 펼쳐졌다. 간단명료하게 전개된 사안이다. 그러나 과거 군사정권과 극우세력들은 제주 4ㆍ3 사건을 ‘반란’ 또는 ‘공산폭동’으로 규정했다. 반면 당시의 정황을 면밀히 분석한 학계와 시민단체에서는 ‘항쟁’ 또는 ‘민중항쟁’으로 정의했다. 이와 같이 상반된 인식차이로 인해 오랫동안 정명(正名)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제주 4ㆍ3사건의 큰 상징은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이다. 4ㆍ3희생자 유족은 복수하지 않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유족들은 서로의 상처를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보듬으며 합동위령제를 봉행해 오고 있다. 반세기가 넘도록 확연한 규명도 하지 못하고 있는, 당시 무고히 학살당한 3만의 영령들께 추모의 마음 금할 길 없다.

 수필가/고 재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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