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茶)를 기다리는 마음
차(茶)를 기다리는 마음
  • 이창숙
  • 승인 2017.03.31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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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3>

대나무사이 야생차밭

 3월이면 작년에 구입한 묵은 차가 떨어지고 햇 차가 그리워지는 시기이다. 아직 찻잎이 피지 않아 차를 좋아하는 이들에게는 춘궁기(春窮期)이다. 이러다보니 이럴 때 마시는 특별한 차가 있다. 다관(茶罐)에 뜨거운 물을 부었다가 마시는 백비탕(白沸湯)이다. 오랫동안 사용하여 차 맛이 잘 배인 다관에 뜨거운 물을 부은 후 다관을 우리는 것이다. 다관에 배인 차 맛과 은은한 차향을 맡으며 봄맞이를 시작한다. 여기에 매화 꽃 한 송이를 찻잔에 띄워 매화 차를 즐겨도 좋다.

지구 온난화로 차를 만드는 시기가 빨라졌다고 해도 4월 중순이 지나야 햇 차 맛을 볼 수 있다. 찻잎을 따는 시기는 그 지역의 자연환경조건과 그해 날씨에 따라 변수가 많다. 산간지역, 일조량과 다원(茶園)의 방향, 강우량 등은 찻잎을 따는 시기만이 아니라 차의 맛과 향기에도 영향을 준다. 그래서 차 철이 되면 차를 만드는 이들은 기후 변화에 민감하다. 대개 곡우(穀雨, 4월20일) 전후를 중심으로 기준을 세우고 준비를 한다. 비가 내릴 때는 찻잎을 따는 것 보다 2~3일 후에 따는 것이 적당하다. 한낮에 따는 것보다는 청명한 날씨 이른 아침에 이슬에 흠뻑 젖은 찻잎이 가장 좋다고 한다. 찻잎은 두 개정도 벌어졌을 때, 일창일기(一槍一旗)일 때 가장 적당하다.

우리나라 야생차나무는 대부분 잡목림이나 대나무 숲 등 나무 밑에서 자란다. 이렇게 반양반음(半陽半陰)의 조건에서 자란 찻잎으로 차를 만들면 감칠맛이 좋다. 1440년~1890년대 문헌에 나타난 차산지는 주로 경상남도 지역과 전남, 전북지역에 분포되어있다. 그 이후에도 차 생산지는 크게 확산은 되지 않았다. 차가 생산되는 지역에서는 고려 때부터 차를 공납하였다. 조선초기에는 차가 제대로 생산되지 않는 곳까지도 공납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는 차산지를 중심으로 다원(茶園)조성과 제다기술은 개발하지 않고 궁핍한 백성들에게 봄철에 차를 만들어 상납케만 했으니, 있는 차밭도 버려져 차를 만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군민들을 위해 다원(茶園)을 조성한 점필재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있다. 그는 1471년 봄에 함양군수로 부임한다. 당시 함양군에는 차가 생산되지 않았는데, 그 지역 군민들은 해마다 전라도에서 차를 구입하여 상납했던 것이다. 쌀 한말로 겨우 차 한 홉을 얻을 수 있을 정도로 차가 귀했다. 그는 이와 같은 폐단을 없애기 위해 군민들에게서 차를 받지 않고 관에서 자체적으로 차를 구해 상공(上供)하도록 한다. 그리고 차밭을 조성하기 위해 차나무 군락지를 찾아다닌다. 마침 엄천사(嚴川寺) 북쪽 대나무 숲에서 차나무 몇 그루를 발견하였다. 인근 땅이 모두 백성들의 밭으로 관전(官田)으로 보상하여 사들인다. 그곳을 다원으로 조성하게 한다. 몇 년이 지나 번식하여 다원 전체에 차나무가 퍼져 나라에 바칠 차를 충당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에 그는 다원(茶園)이라는 시를 통해 기쁨을 표현한다.

신령한 차 받들어 성군께 장수 빌고자 하는데

신라 때의 유종을 오랫동안 찾지 못하다가

이제야 두류산 기슭에서 얻었으니

우리 백성들 한 가지 걱정 덜어 기쁘네

죽림 속 황량한 동산 언덕에

언제쯤 자주색 꽃 새 부리 무성해질까

다만 백성의 괴로움을 덜 고자 할 뿐이니

광주리에 속립아(봄의 차싹)를 담아 받치지 않아도 되리

차 상공(上供)으로 시달려온 백성들의 부담을 덜고 그들과 소통하는 따뜻한 마음이 물씬 풍기는 시이다. 김종직은 지방관으로서 나라의 실정(失政)을 개탄(慨歎)만 하기 보다는 직접 해결하는 진정성이 오늘 우리현실에 울림으로 다가온다.

/ 글=이창숙 문화살림연구원 원장

※이창숙 칼럼 ‘차의 맛, 소통의 맛’은 격주 월요일자를 통해 만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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