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자국 지워가며 길을 걷는 불치의 그리움
발자국 지워가며 길을 걷는 불치의 그리움
  • 김동수
  • 승인 2017.03.23 14: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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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의 금요 전북문단 / 32.한선자(韓善子:1962-)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전주대학교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국민건강보험공단에 근무하고 있다. 1996년 <<문예사조>>에 <기다림>외 2편으로 등단. 전북여류문학회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전북문협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2003년 첫 시집 << 내 작은 섬까지 그가 왔다>>, 2010년 <<울어라 실컫 울어라>>를 출간. 그의 시는 ‘얼마를 더 기다려야 / 바람에 헹군 맑은 소식 한 자락/ 들을 수 있을까요// 당신은 참으로 / 멀리 있습니다.(1998년, 전북 시인 자선 대표 시선집, 시작노트에서)와 같이 맑고 깨끗한 그러면서도 끝내 닿지 않는 불치의 그리움 속에 가을풀 향(香)같은 서정시를 쓰고 있다.

지난 겨울

당신이 유독 그리웠습니다

안개 속 헤맬 때마다

아픈 씨앗으로

가슴에 꼭꼭 묻어 두었다가

바람 속에 감추어

당신 울안에 심어 놓았습니다

이른 봄

당신 창가

목련 꽃잎

수줍게 피어날 때마다

당신 향한 제 지친 노래 들었는지요

목마른 시 한 줄기 읽었는지요

-<목련> 전문

아직도 가 닿지 않는 화자의 외로움과 그리움의 정서를 여성 특유의 애틋한 율조로 내밀하게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묻어 두고’. ‘감추어 둔’ ‘아픈 씨앗’, ‘목마르고’, ‘지친 노래’ 등, 지난날의 상처로부터 그의 시는 비롯되고 있다. 자아와 세계(당신)와의 분리, 동일성의 혼란으로 그의 시는 서정시 본연의 소외와 불안에서 벗어나지 못해 비극적 정조를 띄고 있다.

몸은 막대기처럼

땅에 꽂혀 있었으나

생각은 하루 종일

마른 잎처럼 팔랑거렸다

몇 번 창 쪽을 서성이다

끝끝내 문 열지 못하고

긴 하루가 갔다

-<긴 하루>, 전문

앞의 <목련>에서 드러나 있던 ‘마른 시 한 줄기’와 이 시에서의 ‘마른 잎’이 동맥을 이루고 있다. ‘마른 잎’이 ‘막대기처럼/ 땅에 꽂혀’ 아직 ‘문 열지 못하고’ 있는가 하면, ‘그리움으로/∽/ 이를 악 물었던 기억들/∽/ 가슴에 묻어 둔 것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세상 뒤편으로 꼭꼭 숨어 버리고 싶은’(<자화상, 2003>) ‘닫힘(閉)’과 ‘갈증’의 공간, 이 또한 다르지 않다.

바람이 불어 올 때마다

내 몸 어딘가에

생채기 같은 잎사귀 돋아나

부치지 못하고 말라버린

편지 많아질까 두렵습니다

-<봄 편지 1> 일부

‘부치지 못해- 말라버린/ 편지 많아질까 두려운’ 불안과 갈망이 때로는 ‘빈 술병과 마른 북어 사이 마타리꽃 하나(로) 엎어져’(<자화상>) 지난날의 상처에서 아직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상이 점차 양가적(兩價的) 감정, 곧 지난날의 그 기억으로부터 도피기제로서 은둔과 승화의 두 양태가 아직 혼조 되어 있는 모습이다. 위 시에서처럼 ‘숨고’, ‘닫고’, ‘묻으며’ ‘아름다운 이별’을 위해 <가을 여행?3>길로 나서는 세계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그 아픔

더 오래 기억하기 위하여

내딛는 발자국 지워가며 길을 걷는다

-<아름다운 관계> 일부

에서와 같이 아직도 해소되지 않는 불치의 그리움을 현실이 아닌 망각의 공간에 안치하여 보다 안정된 사랑의 방정식, 곧 영원성의 공간으로의 승화를 시도하는 두 갈림길 속에 그의 시는 살고 있다. (김동수: 시인, 백제예술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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