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불교 흥국사를 찾아
호국불교 흥국사를 찾아
  • 임보경
  • 승인 2017.03.14 18: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천년고찰인 흥국사는 고려시대 1195년 보조국사 지줄스님께서 창건하셨다. 흥국사는 나라가 흥하면 절도 흥하리오. 절이 흥하면 나라가 흥한다는 의미로 호국불교의 사찰임을 말하고 있다. 일주문을 지나 걷다보면 영취산 아래에 자리잡은 흥국사 입구에는 여러군데 흩어져 있는 부도들을 한데 모아놓은 부도들이 세워져 있는데 그중에서 소나무 아래 세워진 부도는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부도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금 더 올라가면 보조국사 지눌스님의 흥국사 창건 유래에 관한 비석이 세워져 있다. 1170년 무신정변이 일어날 무렵 무신들의 정권 장악에 따른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지자 그 기강을 바로잡고자 전국을 돌아다니시다가 이곳에서 연꽃 봉오리에 둘러싸인 이 터를 보고서 흥국사라는 이름을 먼저 지으신 후 사찰을 지었다 한다. 나라를 걱정하고 안정시키려는 마음은 특정권력하에 휩싸인 정치계의 부재속에서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다한 고려인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수박다리를 지나 사천왕이 계신 천왕문에 이르면 동서남북을 상징하는 사천왕을 뵈니 그의 손에 쥐어져 있는 각각의 도구를 살펴볼 수 있다.

지물에는 비파악기, 여의주, 삼지창, 칼을 들고 있다. 죄를 지은 사람을 벌을 줄 때 칼로서 대응하고 신자들이 암흑속을 헤매고 있을 때 비파라는 악기를 들려주면 부처님 곁으로 올 수 있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만물의 소생을 염원할 때 여의주로서 다스리고 불심이 약해졌을 때 삼지창으로 콕콕 찌르며 불심이 다시 일어나게끔 한다는 사천왕의 의미를 들을 수 있었다. 사천왕의 의미를 듣고 있자니 죄를 범하려는 마음을 약화시키며 올바른 생활을 하여 나 하나의 바른 마음과 행동이 모여 이 나라를 강하게 만듦이 이해가 되었다. 이곳을 지나면 대웅전이 보여야 하는데 옆으로 이동하면 봉황루가 서 있었다. 임진왜란때 스님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3도(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의 의승승병조직을 700명가량 하였는데 그 명맥을 이어온 승병들은 300명정도가 계승하였다. 명량이라는 영화에서 승병들의 활약을 알 수 있는데 그분들이 이 사찰의 승병들이었다 한다. 그다음 돌아서 대웅전이 보이는데 현재는 해체하여 복원하려는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대웅전 옆에 위치한 법왕문은 승병들이 군사훈련하기 위한 곳이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승병들을 위한 장소로 짐작할 수 있다. 정유재란때 일본의 재침입으로 남원, 전주, 순천, 여수 등이 초토화되다시피 한다. 이곳도 승병들의 본거지이기에 왜놈들이 이곳을 전부 불사르게 된다. 그 후 조선 인조(2년)때 계륵대사의 지휘하에 재건축되었고 40여명의 스님들이 1,000일 기도를 통해 세워진 대웅전임에 더욱 마음이 깊었다. 현재는 해체 복원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문화재청의 관리하에 해체 복원도 되고 있음을 알고 있듯이 우리에게 흥국사는 특별한 곳이었다.

여수시에는 11점의 보물이 있다. 그중 흥국사에만 9점의 보물이 있다는 것은 여수의 보물이 흥국사임을 증명한다. 시원한 계곡물이 흐르는 무지개 모양의 홍예(교)는보물 제563호로 지정되어 보물은 대웅전(보물 제396호), 후불탱화(보물 제578호), 노사나불괘불탱화(보물 제1331호), 수월관음도 제1332호), 십육나한도(보물 제1333호), 목조석가여래삼존상(보물 제1550호), 강희4년 명동종(보물 제1556호). 목조지장보살삼존상 시왕상일괄 및 복장유물(보물 제1566호)가 보유돼 있다. 이 중에서 대웅전앞에 석탑이 있는 배치이나 이곳은 석탑은 보이지 않고 반야용선이라고 불러 용이 극락의 세계로 나가는 배라 하여 배는 바다에 있기에 이곳은 석탑이 없다. 역시 송광사도 그와 같은 맥락이다. 기단부와 석등의 기단부는 육지의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바닷가의 사찰임을 알 수 있게끔 바닷게와 거북이 등이 장식되어 있음은 특이했다. 대웅전 정문의 문고리는 속설처럼 우리들의 소원을 간절히 맞이했다. 그리고 무사전(시왕전 또는 명부전)을 찾아보니 죽은 이후 재판을 받는 자리로 3년동안 10명의 왕에게 재판을 받고 사후 어떤 존재로 다시 태어날지를 결정받는 곳이라 한다. 조선시대 3년 탈상을 하는 경우나 현재의 49제의 의미로 이 행사를 잘 치르고 나면 좋은 곳으로 가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공감부분이 있었다. 무사전에서 치러지는 심판에서는 개인의 사사로운 형편과 이유를 옹호하지 않고 두둔하지 않는다고 한다는 것이다. 내부에는 염라대왕이 새치의 혀로 죄를 범하지 말라는 표현과 죄를 지으면 얼믐산을 오르게 하거나 독사의 굴레에 휩싸이거나 뜨거운 물에 담그거나 하는 등 벌의 내용이 그림으로 표현돼 있었다. 요즘 세상 죄지은 분들이 너무나 국가와 국민을 힘들게 하는데 무사전앞에 서게 된다면 아마도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려 할 것이며 그 죄를 인정하고 참회의 시간을 갖지 않을까 싶다.

팔상전 원통전을 지나 의승수군전시관에서 가슴 뭉클함을 느꼈다. 11m인 후불탱화는 자비롭게 걸려져 있으며 ‘계사년(1593년) 수군절도사서’ 그때 당시 수군절도사인 이순신 장군의 친필로 쓰인 공북루라는 현판은 위치를 짐작게만 한 채 승병들과 장군의 승리를 다짐하며 북쪽에 계신 임금(선조)을 향해 두손을 모으고 결의했던 것으로 그분들의 기개를 느낄 수 있었다.

종교적으로 보면 불자인 승려들은 살생을 금지한다지만 나라의 위태로움에 교리를 어기면서까지 승병의 역할로 나라의 흥망 앞에 몸을 던진 승병들의 정신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임보경<역사문화원 대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