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선 의료농단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비선 의료농단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 김형준
  • 승인 2017.02.01 18:0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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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진료실에 대리처방을 요구하는 환자의 가족들을 만나게 된다. 학교에 가서, 일이 바빠서, 때론 병원에 오기 싫어해서 등등 갖가지 저마다 불가피한 사연과 이유를 들지만 현행 의료법상 대리처방은 엄연히 불법이다. 하지만 의업도 사람이 하는 일이라 대부분 의사들이 경험했듯이 대리처방의 유혹을 쉽게 뿌리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정말 사정을 들어보면 아픈 데 직접 병원을 찾기 어려운 때도 있고, 이웃처럼 친숙한 환자나 보호자의 부탁을 매정하게 거절하기 어려운 경우도 종종 있다. 하지만 환자의 상태를 진찰, 확인하지 않고 약물을 처방하는 대리처방은 의학적으로도 환자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끼칠 수 있고 법으로도 엄격히 금지하고 있어 요즘 병·의원에서 대리처방은 거의 사라진 듯하다. 의료법 제17조 제1항에 따르면 의사는 환자를 직접 진찰해야 하며 이를 위반하고 대리처방을 한 의사는 자격정지는 물론 형사처벌을 받게 되고 국민건강보험법상 부당 청구로 엄청난 과징금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부득이한 경우 예외 규정을 두고 있다. 가령 환자가 같은 질병에 대해 재진 및 처방을 받을 경우인데, 병원에 나오기 힘들 정도로 거동이 불편한 경우는 한정적으로 의사가 안정성을 인정한 경우에만 대리처방이 인정된다. 그러나 앞선 예처럼 온정과 선의로, 또 의학적으로 큰 문제가 없다는 판단으로 규칙을 어기고 대리처방을 해줬다가 낭패를 본 동료 의사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게 된다. 감기로 고생하는 고3 수험생이 조퇴하고 병원에 올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부모에게 대리처방 했다가 현지조사에 걸려서 처벌을 받게 된 경우와 매번 같은 혈압약을 본인이 안 왔다가 처방 안 해주는 의사에게 불친절하다고 화를 내는 보호자까지…. 이런 일을 경험하게 되면 의사로서 자괴감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대통령과 그 비선 실세를 둘러싼 청문회와 특검을 통해 비선 실세의 의료시스템을 무시한 기막힌 의료농단이 밝혀졌다. 가장 원칙적이고 철저히 합법적이어야 할 청와대에서 정식 의료시스템이 비선 실세에 의해 무너지고, 법과 원칙을 평생 신념으로 생각한다던 대통령이 이를 아무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였다는 사실에 의료인으로서, 또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내가 이러려고 의사가 되었나! 괴롭고, 자괴감이 들 정도이다. 더욱 문제인 것은 여러 차례 대통령이 스스로 밝힌 기자회견 등에서 법과 시스템을 무시한 의료농단에 대해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치부한 가벼운 ‘법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여성(?)으로서의 사생활과 대통령이라는 신분의 특수성에 의한 편의 제공쯤으로 ‘그럴 수도 있지’식의 해명은 대한민국 최고의 훌륭한 의료진과 정식 시스템을 놓아두고 엄연한 현행 의료법을 무시하면서까지 왜 비선진료를 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또한 역시 놀라운 것이 청문회에 불려나온 그 많은 의료인들이다. 이번 의료농단 사태를 보면 국내 최고 대학병원의 병원장인 전 대통령 주치의와 전 의무실장, 비선진료의 당사자인 두 명의 의사, 최순실의 손자 출산을 도왔다는 대학교수 등 역대 청문회 사상 유례없이 11명의 의료인이 연관되어 있다. 하나같이 그 자리에 출석한 의사들은 의료계에서도 최고 권위의 전문가이거나 강남 등의 유명 병원에 유명 의사들이다. 하지만 이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최고의 의료전문가답게 국가안보사항인 대통령의 건강에 최선을 다 했는지, 또 가장 엄격해야 할 청와대에서 합법적이고 원칙적인 의료 시스템을 지켰는지 참으로 실소만 나올 뿐이다. 그들이 그 많은 주사제를 대통령에게 처방했을 때 의학적 판단은 우선했는지, 대리처방·차명진료 등 불법진료를 하면서도 전문가로서 법과 양심의 거울은 비춰봤는지 묻고 싶다. 그래서 의사로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의료윤리’나 ‘의료법’이 비선실세 주변에서 각종 특혜와 이권을 얻고자 헌신처럼 버려야 할 가치였다면 그에 따른 마땅한 책임을 스스로 감수해야 할 것이다.

굳이 ‘김영란 법’을 예로 들지 않더라도 대부분 의사나 국민들은 온정이나 관행상 상식적인 차원에서 용납될 법한 작은 ‘법과 원칙’도 혹시 모를 만에 하나의 문제를 예방하고, 또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철저히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이런 원칙을 어길 시 조금은 지나칠 정도의 처벌을 ‘법과 원칙’이기에 인정하고 그 책임을 감수한다. 단언컨대 비단 의료농단 뿐만 아니라 국정농단, 경제농단, 교육농단, 외교농단 등 이번 모든 비선 실세사태의 본질은 자신들을 ‘법과 원칙’위에 살아가는 특별한 존재로 인식하고, 누군가의 말처럼 묵묵히 법을 지키고 살아가는 국민들은 ‘개·돼지’로 취급한 그들만의 진실에 있다고 생각한다.

체코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말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란 말이 분노를 넘어 허탈하기까지 한 지금 이 감정을 말하는 것일까?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문제는 몰랐다고 해서 그들이 과연 결백한가에 있다. 권좌에 앉은 바보가, 단지 그가 바보였다는 사실 하나로 모든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는 정말 그 누군가의 책임지는, 가볍지 않은 무거운 모습을 보고 싶다.

김형준<신세계효병원 진료원장/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부안군 정신건강증진센터 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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