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그리고 이명박
반기문, 그리고 이명박
  • 이해숙
  • 승인 2017.01.22 16: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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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전과 14범, 대한민국 제17대 대통령 이명박은 ‘4대강 사업’에 30조 원, 해외자원외교 40조 원, 방위력개선 40조 원 등 모두 100조 원이 넘는 국민 혈세를 쏟아 부었다. 그러나 성과는 의문시된 채 그들 형제와 부역자들의 배만 불렸다.

#둘

2006년 2월 14일, 밸런타인데이에 반기문은 유엔사무총장 출마를 선언한다. 대통령 노무현은 반기문 지원을 위해 안보수석을 책임자로 재경부, 기획예산처, 총리실, 국무조정실, 국정원, 외교부까지 참석하는 TF팀을 꾸렸다. 그리고 본인은 선거본부장처럼 뛰었다.

8개월 동안 무려 15개국을 순방하며 정상들을 만났다. 가장 취약한 프랑스 정상회담을 비롯해 급박성이 없는 아프리카 정상회담에도 반기문을 배석시키고 지지를 부탁했고, 선거 지원을 위해 총리를 남미와 아프리카로 보내 선거를 도왔다.

그해 10월14일 반기문은 유엔사무총장이 되었다.

#셋

2008년 대통령 이명박은 광우병 파동으로 지지율이 7%로 떨어지자 맘이 급해졌고, 대통령 재임 때보다 국민들의 사랑을 받던 노무현을 공격하는 것으로 만회하고자 했다. 두 사람이 합의해 봉하 마을로 보냈던 대통령기록물을 국가기밀 누설이라는 거짓말로 봉하 마을 집을 압수수색하고, 노무현이 찾았던 칼국수 집까지 들쑤시고 다녔다. 책임검사 우병우의 비열한 웃음이 언론을 통해 드러났고, 결국 노무현은 부엉이 바위를 찾았다.

#넷

2009년 5월 23일 노랑풍선을 타고 노무현이 떠나던 날, 조문객 이명박은 ‘살인자가 조문한다’는 야유를 뚫고 나타났다. 그러나 정작 반기문은 보이지 않았다. 어떠한 영상 메시지도 서면 추모 메시지도 없었다. 그리고 두 달 후, 반기문은 제주를 방문했다. 그러나 지척에 있는 김해 봉하 마을을 찾지 않았다.

2011년 12월 1일, 유엔 사무총장 이후의 진로를 고민하던 반기문은 노무현의 필요가 생겼을 때 봉하마을을 찾았다.

#다섯

반기문의 대선 캠프에는 이명박 사람들로 가득 차있다. 김숙(MB정부 국정원 1차장), 곽승준 (MB정부 정책통 선대위정책기획팀장 국정기획수석), 이동관(MB정부 청와대 홍보수석), 임태희 (MB정부 청와대 비서실장), 유종하(MB정부 외교부 장관), 김종현(MB정부 호주 대사), 김현일 (MB언론특보), 이상일 (MB계 전 국회의원) 그리고 나경원 의원까지.

#여섯

유엔사무총장 반기문은 2015년 5월 18일부터 5일간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충청도 맹주 김종필을 만나고 대구경북의 핵심인 안동 하회마을을 방문했다. 하지만 그의 일정 속에 세월호 가족들은 없었다. 2014년 8월 16일 “세월호 유가족들의 아픔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 없었다.”라던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과는 너무도 달랐던 풍경이다.

#일곱

“박 대통령이 비전을 갖고 용단을 내린 데 대해 역사가 높이 평가할 것”이라는 말로 반기문은 위안부 협상에 찬사를 늘어놓았다. 박근혜의 힘을 빌리고 싶었던 때문이다. 그는 지금 누군가 힘이 필요하다. 자신을 유엔사무총장으로 이끈 노무현을 배신하고 자살로 내몬 이명박의 등에 업혀 한국정치에 등장한 것도 그러한 이유이다.

자신을 보호해 줄 보호막이 필요한 이명박과 대통령 꿈을 위해 돈과 사람이 필요한 반기문은 그렇게 필요충분조건으로 만난 것 같다.

한겨울 추위 속에서도 촛불로 광장민주주의를 지키려는 국민들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말이다.

이해숙<전라북도의회 교육위원회 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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