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
  • 이동희
  • 승인 2017.01.05 20: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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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해가 밝은지 상순이 지나고 있다. 어느 선지식(善知識)은 날마다 뜨는 해에 ‘새해’나 ‘묵은해’가 따로 있겠느냐며. 참다운 새해는 떠오르는 해가 아니라, 마음이 새로워지는 데 있음을 지적한다. 하긴 그렇다. 시간의 단위로서 지난 1년은 두 번 다시 되돌아오지 않는다. 새해를 맞아 되돌아오지 않을 묵은해의 미망(未忘)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또 있을까? 그래서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새해를 맞아야 한다.

마음을 새롭게 하려니 묵은해의 찌꺼기가 성가시게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다. 온 나라와 온 국민을 부끄러움과 혼란 속에 몰아넣었던 대통령 한 사람의 닫힌 마음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묵은해에 묶어두는 형국이다. 그도 떠오르는 새해를 바라보며, 행여 새로운 마음가짐을 다짐했을까? 모르면 몰라도 그럴 가능성은 전혀 없어 보인다.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길은 사람의 말 외에는 별다른 수단이 없다. 스스로 토해낸 말밖에는 말하는 사람의 마음에 들어갈 묘수는 없다. 그래서 헤겔은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있다”고 했나 보다. 말하는 사람만이 말하는 자신의 마음을 열어 보일 수 있다. 스스로 연 마음의 문을 통해 소통과 공감의 길을 낼 수 있으며, 그 길을 통해 우리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공존 공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대통령이 새해 첫날 느닷없이 간담회(懇談會)라는 형식으로 기자들을 불러모아 놓고 내 말만 쏟아내고는 [마음의]문을 닫아버린다. 자기의 마음만 닫는 것이 아니라, 말을 전할 기자들의 눈[카메라]과 귀[녹음기]를 묶어놓고는 언필칭 간담회란다. 간담회라는 글자에 담긴 심오한 뜻은 그만 두고라도, “정겹게 서로 의견을 나누는 모임”이라는 간담회의 취지와는 정반대로 자기가 하고 싶은 변명과 억지만 늘어놓는다. 안쪽에 달려 있다는 [마음의]손잡이를 열려고 애쓰는 성실성은 ‘손톱만큼[자신의 표현대로]’도 없이 그저 변명과 억지로 일관한다. 안에 있다는 [마음문의]손잡이를 열기는 고사하고, 밖에 있는 소통의 손잡이마저 모조리 묶고, 닫고, 가려놓고서 어떻게 소통하고, 무슨 수로 공감할 수 있겠는가?

멕시코의 시인 옥타비오 파스는 이렇게 노래한다. “마음은 마음 아프다/ 미친 마음 때문에:/ 묘지는 묘판/ 씨앗은 속이지 않는다.// 귀의 미궁,/ 네가 하는 말은 자신을 속인다/ 침묵에서 외침까지/ 들리지 않는 소리,// 무죄는 죄를 모르는 것:/ 말을 하려면 침묵하는 것을 배워라.”(시「말한 말」전체 7연에서 끝부분 3연)

문학은 항구성과 보편성을 지닌다. 1914년에 태어났고, 1990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며, 1998년에 작고한 멕시코 시인, 시대와 지역을 멀리 건너온 그의 시가 오늘 우리 시대를 은유해도 전혀 구태가 나지 않는 비밀 아닌 비밀은 바로 문학의 항구성과 보편성에 있다.

파스의 시를 읽으면 섬뜩하리만큼 정확하게 그려낸 삶의 진실과 사람됨의 마음가짐을 실감할 수 있다. [사람의]마음은 [사람의]마음 때문에 아파한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공동체를 이룬다. 사람의 마음 때문에 아파하는 사람, 사람의 마음 때문에 [악어의 눈물이 아닌]뜨거운 눈물을 흘려본 사람만이 내 안에 있는 마음의 손잡이를 열고 밖으로 걸어 나와 소통과 공감의 길을 걸을 수 있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씨앗을 남긴다. 그러므로 묘지는 또 다른 의미의 묘판이다. 묘판에서 돋아난 씨앗은 죽은 자의 유전자를 그대로 물려받는다. 그래서 씨앗은 속이지 않는다. 콩에서 팥이 나올 리 없고, 도척[「莊子」에 나오는 큰 도적]의 묘판에서 공자孔子의 씨앗이 나올 리가 없다. 다만, 자신의 안에 있다는 마음의 손잡이를 스스로 열고 나오는 사람만은 예외다. 소통과 공감의 길을 나서기로 작정한 이에게는 돌연변이의 가능성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 바로 사람됨의 비밀 아닌 비밀이다.

타인의 귀와 입을 막아놓고 하는 말은 자신을 속이는 말이다. 침묵의 소리는 물론 천만 명이 촛불을 들고 외치는 빛의 소리도 들을 수 없으며,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변 사람들의 행실과 입을 통해 모두가 죄인이라고 지목하는데도 “나는 무죄”라고 ‘말한 말’을 쏟아내는 것이다. 아하~! 이제야 알겠다. 무죄는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무죄는 죄를 모르는 것!’이었음을, 소통과 공감의 대로를 향한 마음의 문을 닫아두고 있음을 알겠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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