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 전라도 천년의 심장부 ‘전라감영’ 복원
[신년] 전라도 천년의 심장부 ‘전라감영’ 복원
  • 한성천 기자
  • 승인 2016.12.23 15:0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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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었다면 곧바로 나라도 없어졌을 것이다.’라는 뜻으로 충무공 이순신이 한 말이다. 조선 실학자 유득공이 1795년 편찬한 이순신 문집 ‘이충무공전서’에 들어 있는 글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충무공은 ‘호남(湖南)을 중심으로 나라(朝鮮)를 구할 수 있었다’고 평가했다. 충무공을 따르던 조선 해군과 호남 민중은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고, 일본 왜군이 남해와 서해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호남을 관리했던 곳이 바로 ‘전라감영’(全羅監營. 전라감영지 전북기념물 제107호)이다. 전라감영은 호남의 영광이자 조선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조선정신말살정책’ 일환으로 일제강점기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이자 조선의 심장부인 ‘전라감영’과 ‘전주부성(全州府城)’을 철저하게 파괴했다. 남겨진 것이라곤 전주부성 사대문 중 남문인 ‘풍남문’(豊南門. 보물 제308호)과 ‘풍패지관’(豊沛之館. 전주객사 보물 제583호) 만이 세월속에 묻혀 당시 풍채를 전하고 있다.

이제 전라감영의 그 영광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우리 눈앞에 펼쳐질 날이 멀지 않았다. 2017년 ‘선견’과 ‘총명’을 상징하는 붉은 닭의 해인 정유년(丁酉年), 희망을 쏘아 올린다. 전라감영을 희망공간으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2016년 6월부터 약 5개월간 복원 예정지 전체면적(1만6117㎡)을 대상으로 발굴조사를 마쳤다. 전라감영의 핵심인 선화당과 내아, 관풍각, 내삼문, 비장청터 등 주요 건물터가 확인됐다. 이로써 2017년 한해는 전라감영 복원사업에 가속도가 붙을 전망이다.

#1. 천년역사 이어온 호남·제주의 행정·군사 중심지

전라감영은 전라북도·전라남도·제주도의 행정과 군사의 중심지였다. 조선 500년간 같은 장소에 있었다. 규모나 건물 규모 역시 조선조 감영 가운데 가장 컸다. 조선 태조의 본향이 전주였다는 사실 때문에 객사와 감영, 부영 배치의 조화뿐만 아니라 경기전, 조경묘가 적절한 공간 배치를 이루고 조성되었다. 다른 감영에서는 볼 수 없는 공간구조를 가지고 있다.

전라감영은 조선 감영을 대표할 수 있는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천년의 역사를 지켜온 산실이라는 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다. 조선왕조 500년의 중심이었다. 근대화의 과정에도 100여 년간 전라북도 행정의 중심지였다. 또 민중권력의 출발지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호남 일대에서 봉기한 농민군은 전라감영을 점령했다. 전봉준은 관찰사와의 담판으로 전라도 일대의 폐정개혁을 담당하는 ‘집강소’를 각 군현에, 개혁의 중심기구인 ‘대도소’를 전주객사와 감영에 각각 설치했다. 한국근대사 초유의 농민권력을 탄생시킨 역사지다. 비록 외세의 개입으로 개혁은 좌절됐지만 농민의 권력행사와 참여의 경험은 커다란 충격이었다. 한국근대사에서 국민주권을 실현한 역사적 의의가 크다.
 

 #2. 전통문화관광 중심축으로 복원…희망공간으로

전라감영은 전라문화 발전의 중심이었다. 조선 전기로부터 ‘전주한지’(全州韓紙)의 생산력에 힘입어 완판본 전적들을 간행하여 조선의 인쇄문화 발전에 기여했다. 감영 내의 지소와 인청의 존재는 전라감영의 특징적인 요소다. 인쇄술의 발전과 완판본의 간행은 전라문화의 지식기반을 축적하고 보급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특히, 조선후기에 다양한 완판본 소설과 가사류의 간행으로 판소리의 보급과 함께 민중의식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감영에 선자청을 두어 ‘전주 합죽선’을 비롯한 부채 제조기술 발전에도 기여했다.

이렇듯 역사중심지 전라감영 복원사업은 ‘호남제일성’(湖南第一城)으로서 전주의 역사성을 보여줄 수 있다는 것과 전라도 문화 발전의 기반이 되었다는 점에서 매우 역사적인 일이다.

#3. 한옥마을 외연확장과 원도심 활성화 가교

오늘날 전라감영 복원은 전주 한옥마을과 풍남문, 풍패지관(객사), 걷고싶은 거리를 연결하는 전주관광의 중요한 축이다. 전주시 핵심 관광산업이 될 전망이다. 복원될 전라감영은 전주의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이다. 시민들에게 자긍심을 불어넣는 공간으로 재창조될 전망이다. 한옥마을의 외연 확장과 원도심 활성화와도 직결된다.

전라감영 복원은 천년의 역사가 축적된 옛 4대문 안 역사도심 회복과도 맞물린다. 전라감영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화재와 역사문화자원을 간직한 4대문 안이 복원되면 한옥마을로 국한된 전주관광 영역이 넓어져 침체된 원도심이 활기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4. 철저한 고증으로 원형 복원…천년을 깨운다

2016년 11월 전라감영 복원에 속도를 낼 전라감영지 발굴조사가 마무리됐다. 전라감영의 중요 건물들의 위치를 확인했다. 국가기록원에 소장된 1928년과 1937년에 1/300 축적으로 그려진 ‘전라북도 구도청사 도면’들은 전라북도에서 건물의 신축 또는 증축 공사를 위해 예산을 신청한 문서철에 들어 있는 자료다. 시기를 달리하는 두 장의 일제강점기 구도청사 도면에는 선화당이 표기돼 있어 선화당의 위치를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로 활용됐다. 1928년 그려진 구도청사 도면 역시 감사 부친의 처소인 관풍각(觀風閣)의 위치를 확인한 중요한 자료였다. 1937년 구도청사 도면은 선화당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었다. 발굴조사 현장에서 일제강점기 도면과 대조하여 전문가 검증을 통해 확인하는 작업을 거쳤다.

발굴조사에서는 선화당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는 내삼문에서 선화당으로 이어지는 인도시설의 일부가 선화당 추정터의 남쪽에서 발굴됐다. 또, 선화당 북쪽에서는 전라감사 가족의 처소인 내아의 기단석과 부석시설, 연도부 등이 발견되고, 선화당 동쪽에서는 지난 1928년 도면에 표기된 관풍각과 관련된 기단석이 각각 발견되기도 했다.

전주정신이 살아있는 전라감영에는 공간과 시간, 건축과 전주정신을 녹여 건물 하나 하나에 세겨야 한다. 또, 전라감영은 전주시민들에게 역사적 자긍심이 되고, 전주의 위대한 번영을 알리는 핵심적인 공간으로 재탄생시켜야 한다.

문화재 복원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일이다. 단순한 건축물 복원이 아닌 전라감영에 담긴 역사적 가치와 문화, 자존감 회복을 통해 ‘전통문화중심도시 전주’의 옛 영광을 복원할 전라감영은 2017년 정유년 전북도민들에게 새 희망을 선사할 공간이기에 소중한 전북의 자산이다.

한성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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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호 2017-01-06 07:45:15
응원합니다!
흉내만 내는 보여주기식 사업이 아닌 지속가능한 사업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한국의 관광도시 전주가 세계의 관광도시 전주가 되기를 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