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시기를 함께 건너자
고난의 시기를 함께 건너자
  • 이용호
  • 승인 2016.12.06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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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년 전, 사회부 수습기자 시절이다. 새벽 5시쯤, 노량진 경찰서 형사계를 돌다가 한 쓰레기통에 눈이 꽂혔다. 밤새 쓴 조서 몇 장이 구겨진 채로 거기 있었다. 당시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이어서, 잘못 쓰면 구겨서 버리곤 하던 때이다.

기대감에 부풀어 경찰서 뒤편으로 갔다. 간통사건이었다. 인근 노량진 수산시장의 남성 경매인과 수산물 가게 여사장의 불륜이었다. 사회 첫발을 디딘 수습기자에게는 참으로 흥미로운 사건이었다.

쓰고 싶었다. 형사에게 보충 취재를 갔는데, 그 형사가 펄쩍 뛰었다. 보도하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여사장 가족은 아직 이런 사실을 모른다는 것이다. 조용히 사건을 처리하겠다고 했다.

고집을 꺾지 않자, 형사는 매달리다시피 했다. “사실은 여사장 딸이 고 3 수험생인데, 이 내용이 보도되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했다. 그쯤 해서 브레이크를 밟았어야 하는데 세상물정도 모르고 기사 욕심에 눈이 멀어 기사를 송고했다. 다음날 그 사건은 조그맣게 보도됐다.

그 뒤 그 형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 여사장은 남편으로부터 삭발을 당해 쫓겨났고 여고 3학년 딸은 충격으로 학교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도 그 가족에게 참으로 미안하다. 당시 여고 3학년 학생은 어느덧 40대 후반이 되었을 것이다. 지금은 세상이 바뀌어 간통죄 자체가 없어졌지만, 기자랍시고 철없이 작은 칼을 휘둘렀던 것이 후회된다.

그 사건은 사회적 정의에 대해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적어도 기사 욕심만으로 기사를 쓰는 기자는 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불현듯 수습기자 시절이 떠오른 것은, 국가를 발칵 뒤집어 놓고 있는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 때문이다. 미르 재단 이사였던 조희숙씨가 최근 의원회관 사무실로 찾아왔다. 방송 작가 출신인 그는 전주 한옥마을에 무형 전통문화를 착근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우연하게 미르 재단에 발탁되었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미르재단 전 사무총장 추천으로 국무조정실 국제원조사업(ODA) 새마을 분과위 민간위원으로 간다. 올해 국정감사를 하면서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고, 미르 재단이 조씨를 통해 새마을 해외 사업까지 간여하려 한 의혹이 있음을 제기했다. 조씨는 자신이 피해자라고 했다. 재단에서 들러리였다고 했다. 처음에 무형 전통문화 진흥에 기대를 걸었지만 몇 달도 안 되어 뭔가 잘못되어 간다는 사실을 감지했다. 자신은 장기판의 졸처럼, 누군가에 의해 이용당하는 처지였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예전 수산시장 여사장처럼 조씨의 딸도 고 3이었다. 그는 딸 때문에 찾아왔다. 평소 어머니를 자랑스러워하던 그 딸이 요즘은 부끄럽다고 한다는 것이다. 딸을 위해 작은 명예나마 지키고 싶다고 했다.

외교부 출입 기자 시절, 기사 경쟁이 붙으면, 화를 당하는 것은 외교부였다. 외교 기사는 상대국이 있고 국익과도 연관이 있기 때문에 신중한 접근이 필요한 분야이다. 그럴 때면 이렇게 얘기하는 고위 간부가 있었다. “이기자, 엉뚱한 것 좀 쓰지 말게. 차라리 무능한 기자가 나아. 나라를 위해서 말이야”

지금도 그분의 말이 귓가에 쟁쟁하다. 누구나 힘이 있다고 해서, 주관적 정의감으로 주어진 칼을 가볍게 휘둘러서는 안 될 것이다. 불운하게도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는 사람은 늘 있게 마련이다. 지금이 바로 그런 시절인지 모르겠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힘든 시기를 함께 건너고 있다. 12월이다. 서로 세심한 관심과 배려가 필요할 때이다.

이용호<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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