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그 땅에 무릎 꿇고 이마 대어
호남 그 땅에 무릎 꿇고 이마 대어
  • 조원영 기자
  • 승인 2016.12.01 16: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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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 중기 대학자 이익은 그의 저서에서 벽골제를 풍요의 고장, 호남의 명칭 유래로 풀이한다. 벽골제는  ‘나라 안에서 가장 큰 호수’로 “많은 농지에 수리(水利)의 혜택을 입혀주므로 백성은 그 혜택으로 먹고산다. 이 호수 아래쪽을 호남, 오른쪽을 호서”라 칭한다고 하였다.

또한, 소설가 조정래 선생은 일제강점기를 다룬 아리랑 1권에서 대동여지도의 제작자 김정호 선생을 등장시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분은 험산 준령이 반도의 칠 할을 넘고… 그 땅에 다행히 호남평야가 있어 거기서 난 곡식으로 이 땅의 목숨 칠 할이 먹고산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호남평야에 발을 디딜 때마다 그 가없이 넓은 벌에 무릎 꿇고 이마 대어 고마움의 절을 올렸다는 것이다.’ 라고.

위 일화들은 식량생산 기반으로서 호남평야와 벽골제의 가치를 웅변적으로 증언한다. 근대 이전 오천년 농경사회는 ‘임금에게는 백성이 하늘이고, 백성에게는 먹을거리가 하늘’이라는 인식이 국가지도자인 왕에 의해 천명되는 농업기반사회였고, 식량생산의 기반인 호남평야와 치국의 핵심이자 치수의 상징인 벽골제의 가치는 타의 추종을 불허 했다.

▲벽골제, 오천년 농경문화의 상징

삼국사기에 의하면 벽골제는 지금으로부터 1,700여년 전인 삼국시대 신라 흘해왕 21년(기원 후 330년 / 백제 비류왕 27년의 오기로 추정)에 시축되었고, 김제의 옛 이름을 따 이름 지은 것이라 한다. 이후 벽골제는 통일신라와 고려, 조선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교체에도 각종 국가기록에서 중 수축 및 기능과 역할이 조명됐으며, ‘나라 안에서 가장 큰 호수’라는 위명 아래 지금까지도 대표적 저수지라는 상징성을 이어오고 있다.

현재 국가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는 물 담았던 제내(堤內)는 농토로 바뀌어 저수지의 풍광은 사라지고 남아있는 두 개의 수문을 포함한 현존 약 2.5㎞의 제방과 조선 전기 중수시 건립한 중수비가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이에 김제시는 벽골제 제방의 북쪽 구역에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을 포함한 약 6만여 평의 박물관복합단지를 이루어 농경문화의 원형적 상징으로서 사적 벽골제와 김제 만경 들, 그리고 농경문화의 가치를 조명하고 있다.

▲벽골제, 아시아 생산기반시설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현재 벽골제는 그 가치의 실질을 드러내고자 20012년부터 2016년까지 총 7차의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중이며 2020년까지 발굴이 예정되됐다.

현재까지 진행된 발굴조사를 통해 중심거로 추정되는 수문의 구조 및 제방성토 공정을 확인하였고 제방 기저부 아래 초낭(草囊:흙을 채운 풀 주머니)구조와 들것형 목제품이 출토되는 등 벽골제의 전모를 밝힐 고고학적 결과들이 축적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김제시는 생산기반시설로서의 저수지 제방 조명을 통해 오천년 농경문화의 상징으로서 벽골제의 가치를 드러내고 쌀문명권이라는 거대한 문명적 틀을 이해하는 단초로 삼아 향후 벽골제에 대한 세계문화유산등재를 추진할 예정이다.

이에 앞서 올해 11월 국내 최초로 세계관개시설유산에 등재되어 그 우수성을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바있다. 세계관개시설유산이란 국제관개배수위원회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제도를 차용해 역사적, 사회적, 기술적 가치가 있는 관개시설을 유지 보존 홍보하려는 목적으로 2014년부터 운영하는 제도이다. 이번 성과를 통하여 고대 동아시아 수리시설의 역사와 축조기술을 잘 보여주는 벽골제의 가치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21세기 지역박물관의 화두는 지역정체성의 천명이다. 터한 땅에 역사로 직조된 무수한 자료와 주제들을 발굴·가공·연마하여 ‘땅’과 사람을 묶고 역사문화를 드러내는 일, 지역민이 지역을 보다 자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이해심화를 도모하는 일, 그리고 지역 외 사람들이 그 지역을 새롭게 ‘발견’하게 하는 일, 이른바 지역정체성을 조명하고 소통시키는 일을 주요과제로 삼고 있다.

김제시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사적 벽골제의 북단 수문지 주변의 약 6만여 평의 대지 위에 1998년 벽골제수리민속유물전시관(현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개관을 시작으로 1999년 벽천미술관, 2003년 아리랑문학관, 2009년 농경사주제관 및 체험관을 개관하였다.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농경사주제관 및 체험관 아리랑문학관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은 세 개의 상설전시, 농경문화, 생활민속, 벽골제언을 통해 김제만경 너른 들이라는 벼농사에 맞춤한 천혜의 들과 인공산업구조물 벽골제, 그리고 농자(農者)의 구슬땀 노동, 삼박자가 직조해 낸 호남, ‘생명의 땅’이라는 근원적 가치의 의미망을 조명한다. 하여 벽골제농경문화박물관 전시는 박물관의 울타리를 벗어나 들녘의 봄·여름·가을·겨울, 눈과 비·불볕과 훈풍을 끌어안고 사람살이의 순환과 길고 긴 역사로 확장 소통된다.

▲사적 벽골제 내 각종 체험학습들, 민속놀이참여체험장

벽골제단지는 최근 학교 및 가족단위의 체험학습장의 역할로 주목받고 있다. 농경사주제관 앞마당에 해당되는 민속놀이 참여체험장에서는 총 3개의 상설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상설프로그램은 선비문화와 짚풀공예, 목공예로 운영되는데, 선비문화체험은 전통예절 인성교육과 명상, 우리옷 한복체험으로 구성되어있으며 의관 정제한 훈장선생님의 지도아래 천방지축 말썽꾸러기도 얌전한 서당학동으로 변신하곤 한다.

짚풀공예는 볏집과 보리짚을 가지고 계란꾸러미, 여치집, 컵받침, 짚인형 등을 만든다. 볏집과 보리짚은 뿌리부터 이삭까지 무엇 하나 버릴 것이 없는데, 줄기인 짚이 온갖 생활자료로 바뀌는 모습은 여전히 이채롭다. 목공예교실에서는 전통연, 솟대, 솟대형 장식물, 나무시계, 각종 캐릭터 기념물을 제작한다. 벽골제에서는 관광지 활성화 차원에서 기존에 운영되는 프로그램 외에 한지공예, 압화공예, 매듭공예 등 총 8종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추가 운영할 계획임을 밝혔다.

▲창작스튜디오 집중하자 몸과 마음

창작스튜디오에서는 총 5인의 작가가 자신의 창작활동과 함께 벽골제를 찾는 많은 관람객들과 자기분야의 경험을 나눈다. 분야는 도자기, 한국화, 서예문인화, 천연염색, 목공예이다. 도자기체험에서는 각종 도기제작의 방식을 체험할 수 있고, 한국화에서는 주요기법과 수묵이나 수묵담채 등의 방법에 도전해볼 수 있다. 서예문인화체험에서는 정자체나 흘림체 등의 서예필법을 지도받을 수 있으며, 천연염색의 경우 핸드폰고리, 천연비누, 브로치 등의 제작을 운영한다. 민속놀이 참여체험장이나 창작스튜디오 모두 분야별로 체험일자에 다소 차이가 있으며 사전 예약이 필수이다. 연락처는 벽골제아리랑사업소(063-540-4985 / 4989)이며 전체 무료로 운영되는 선비문화체험 외에는 3,000 ~ 10,000원 정도의 체험료가 따른다.

▲벽골제, 세대간 전승이 일어나는 우리시대의 교육학습 놀이터

벽골제에서는 세대별 관람객의 태도에 차이가 보인다. 오십대 이후 세대들은 농촌을 삶의 기반으로 하였거나 지금도 기반으로 하는 생산자들이다. 그리고 삼사십대의 경우 그런 부모의 후원아래 도시의 삶을 살아왔던 세대들이고, 그 세대의 자녀들인 유초중등세대에게 농경문화는 매우 낮설다.

그런데 박물관을 관람하거나 체험 중 농경문화에 바탕을 둔 부분에서는 연세드신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경험을 바탕으로 자녀와 손주에게 이런 저런 설명을 하시는 광경을 볼 수 있다. 현장에서의 직접경험은 아닐지라도 전시와 유물, 그리고 체험학습을 통해 세대간의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뿌리깊은 의식과 무의식의 공통기반인 농경문화의 저변에 살짝 접속이 일어난다.

김제=조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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