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시의 왕도 재발견
전주시의 왕도 재발견
  • 최상섭
  • 승인 2016.12.01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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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시의 종합경기장 개발 사업이 송하진 지사와 김승수 시장 간의 줄다리기 양상으로 보여 지는 듯 여러 가지 보도가 나오고 있으나 이는 전주시와 전라북도의 무궁한 발전의 틀인 백년대계를 위한 장고 수 임을 전북도민과 전주시민들은 더 잘 알고 있다.

 금산사는 진표율사(776년)가 중창한 이래 크게 세 군데(대사구. 광교원구. 봉천원구)의 사찰로 존속해 왔었고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두 난을 거치면서 처형 뇌묵대사(조선의 3대 승병장 중 1인)가 금산사에서 승병을 조직하고 일본군에게 대항하여 막대한 전략적 손실을 주었으며 대부분의 사찰이 그랬듯이 이에 격분한 일본군이 금산사를 모두 불질러버렸고 불에 타지 않는 석조물만 남아 있었다. 지금의 금산사는 대사구 자리에 1601년 수문대사가 재건하여 15년의 세월이 흐른 1615년에 완공한 사찰이다.

견원(甄萱)이 후백제를 건국한 해는 892년이고 936년(신검 1년) 9월에 고려태조 왕건(王建)에게 멸망당할 때까지 2대에 걸쳐 45년간 존속했었다. 당시 견원이 지금의 전주시에 왕도(王都)를 건립할 때가 889년이었다. 당시는 궁예가 세운 후고구려, 신라와 더불어 후삼국을 형성해 서로 패권을 다투었고 가장 강력한 왕권국가를 형성했었다.

특히 927년에는 신라를 침공해 경애왕을 살해하고 경순왕을 세워 세도정치를 하게 했었고 고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왕권국가를 형성했었다. 그러한 후백제가 930년 고려와의 고창(古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전투에서 대패하고 이어서 934년 웅진(웅진 :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 이북의 30 여 성을 빼앗기면서부터 대세는 고려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었다.

이처럼 어려운 환경에서 936년 고려 태조가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과 함께 10만 대군으로 총공격해 오자 신검은 일리천(一利川 : 구미시의 낙동강 상류) 전투에서 대패하고 마침내 항복해 후백제는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견훤이 889년에 전주에 왕도를 건설했다는 점이다. 전주시가 가장 크게 부각시키고 이를 문화 자원화의 틀로 가꾸어 전주시민의 자긍심을 높이고 패러다임을 새롭게 맞출 때가 늦었지만 지금인 것이다.

지난 11월 24일 위 언론 보도를 보면 “후백제 역사문화 찾기”의 구체적인 사업을 전주시가 주체가 되어 경기전 등 조선왕조 뿌리로의 도시 개념을 넘어 후백제 수도로써의 역사 문화 발굴을 통해 도시 이미지 개선과 도민의 자존심을 높이는 사업으로 진행하겠다는 보도는 참으로 고무적이라 할 수 있다. 새롭게 구성된 후백제 역사문화 다울마당은 역사학자와 문화재 전문가등 14명으로 구성하고 전주시민놀이터에서 첫 회의를 갖고 후백제 관련사업 발굴 및 정책마련을 위한 논의를 계속하고 있으며 330만m²(약 100만평)을 아시아문화 심장터로 만드는 토대를 마련했다.

이날 회의에 참석한 참석자들은 내년도 후백제 관련 사업 및 로드맵 마련을 위한 논의, 후백제 궁성 및 도성으로 추정되는 전주시 물왕벌과 기자촌 일원의 후백제 유적 조사를 위한 지하물리탐사, 후백제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고자 종합적으로 전문 연구 기관인 후백제 연구센타 건립 등 후백제 사업 추진방향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했다.

요즈음 지역의 특수성을 살리어 관광의 자원화로 지역 경제의 위상을 높이는 도시가 늘어나고 있는 현실에서 늦었지만 전주시의 견훤 왕도를 조명하여 새롭게 역사의 사실을 규명하고 전주시의 위상을 높이려는 이 사업은 전주시 65만 시민의 오랜 소망이고 숙원사업이었다. 이제 견훤 왕도의 재구성으로 왕도로서의 전주시의 모습을 새롭게 탈바꿈하려는 전주시에 시민의 한 사람으로 찬사를 보낸다.(당일 회의록과 기사를 참고했음)

최상섭 김제시 향토사 연구가(금산중학교 전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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