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지사 송원 심재순 선생 공적비 제막
애국지사 송원 심재순 선생 공적비 제막
  • 이혜숙
  • 승인 2016.11.24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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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권(國權)을 강탈해간 일제침략에 분연히 맞서 나라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싸우신 송원 심재순(1898~1939) 독립운동가의 공훈을 기리는 공적비 제막식이 선생이 태어나신 군산시 나포면 부곡리에서 있었다.

이우실 서부보훈지청장, 이석규 생존 애국지사, 김양규 향토사학자, 이강안 광복회전라북도지부장, 소재호 석정문학관 관장과 심재순 선생 유족들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유족대표인 심재순 선생의 자녀이며 광복회 전북지부 회원 심안보 씨는 “나라사랑의 숭고한 뜻을 영원히 계승하기 위하여 고향의 영산인 취성산 기슭 부곡들판 원두에 후손들이 경모의 뜻을 담아 공적비를 세웠다. 왕림하시어 자리를 함께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했다

올해는 송원 심재순 선생의 서거 77주년이 되는 해이다. 송원 선생은 조국이 일제에 병합된 암울한 시대에 오롯이 독립운동에 투신한 애국지사이다. 1918년 군산영명학교 2학년 재학 중 3·1만세운동에 앞장서다가 군산경찰서 일경에 체포되어 온갖 고문 끝에 석방되었다. 이후 1925년 국권회복의 역량을 키우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의 동성인쇄소에 재직하면서 각종 도서와 출판물을 통하여 국제정세와 선진문명의 식견을 넓히고 극일(克日) 의지를 실현하기 위하여 이상재 선생이 이끈 신간회에 가입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청년, 여성, 농민의 역량을 모아 조직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해 나가도록 하는데 진력하였다.

1927년 소작민들에게 비밀리에 연락하여 악랄한 일본의 수탈에 맞서 <옥구농민 항일항쟁> 유발에 기여하였으며 1930년 체포되어 모진 고문의 후유증으로 거동이 불편한 몸을 이끌고 군산, 익산, 김제지역을 다니며 야학과 순회강연의 민중계몽활동을 실시하여 나라사랑 정신과 자주독립의 의지를 고취시켜 나가는데 심혈을 기울이다가 끝내 광복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1939년 향년 41세에 영면했다.

2005년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독립유공자로 추서하고 대전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했다.

이혜숙 도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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