짙은 어둠과 탁류가 끝나는 곳
짙은 어둠과 탁류가 끝나는 곳
  • 이문수
  • 승인 2016.11.20 17: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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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원고 마감 시간은 다가오는데, 고민이 생겼다. 필자가 글을 쓰는 이유는 미술학을 전공한 전문가로서 미술을 통해서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의 지점과 의미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미술로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면서 이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하수상한 시절에 미술 담론이 무력해 보일 것 같은 자괴감이 자리를 잡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시 용기를 내서 글을 쓴다. 동트기 전에 어둠이 가장 짙으니까.

수년 전에 전시기획을 하면서 군산의 어느 갤러리와 인연을 맺은 적이 있다. 그곳에서 군산의 역사와 지역적인 특성을 살려내려는 ‘군산굴기’, ‘장미동 이야기’를 기획했다. 전시를 위해 군산을 들여다보는 과정에서 백릉 채만식 선생의 대표작인 <탁류>를 읽었다. 주인공 초봉의 기구한 삶을 통해 혼탁한 세상을 꼬집으며, 1930년대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사회상을 풍자적으로 그려낸 사회소설. 초봉의 삶과 대립하는 계봉의 삶을 통해 탁류가 끝나는 곳에 희망의 바다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희망의 바다는 광화문 광장에 모인 사람들이고, 그 바다에서 촛불 파도가 출렁이고 있다. 아무리 짙은 어둠도 빛을 이길 수 없다.

전시 기획자는 문제를 제시하는 사람이다. 합당한 문제를 제시하기 위해서 자료를 수집하고, 탐방하고, 그 문제에 상응하는 미술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미술가를 섭외한다. 그래서 전시기획은 전시장이라는 건축적인 공간을 연출하는 창작행위이다.

지난달 말에 <아시아현대미술전 2017>의 미술가를 섭외하기 위해 9박 10일간 타이베이와 뉴욕에 공무국외 여행을 다녀왔다. 대만은 작은 섬나라다. 역사적으로 볼 때, 대만은 한국과 비슷한 길을 걸어왔다. 일본의 식민통치, 다른 이념으로 인한 분단, ‘한강의 기적’과 ‘대만의 기적’으로 불리는 성공적인 경제성장, 권위적인 통치기를 딛고 정치적 민주화를 이뤄냈다. 대만은 막강한 중국의 견제 때문에 국가로 인정받지 못해서 올림픽과 같은 국제행사에 참여해도 국기를 걸 수 없다. 지리적으로 고립되기 쉬운 처지에 있고, 정치적으로도 불안한 요소들이 도사리고 있다.

하지만, 우수한 공교육의 영향으로 인문 교양 수준이 높고 대만 정부의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전폭적인 투자는 인상적이다. 아낌없는 재정 지원으로 자유롭게 창작할 수 있는 여건을 잘 채비하고 있다. 소박한 겉모습 속에 감추어진 단단함이랄까. 그래서 ‘작지만 강한 나라’로 불리는 것 같다. 대만에서는 열린 생각으로 교류하고 연대하면서 도전을 즐기는 미술가를 만날 수 있다. 그들은 경계를 넘나드는 거침없는 예술 행위로 혼잡한 정체성을 자유롭게 표출하는 매력이 있다.

전북도립미술관은 내년부터 타이베이의 뱀부커튼 레지던시에 전북의 청년미술가를 파견할 예정이다. 그곳에 체류하면서 낯설고 이질적인 예술향을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현대미술은 우리에게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고 다른 관점에서 세상을 해석해 보라’고 권한다. 이제 눈을 들어 사정거리 밖을 바라보자.

이 땅에서 청년미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버겁다. 그렇다고 하루하루의 삶에 함몰한다면, 임계점에 다다라 폭동을 일으킬 수는 있지만, 혁명은 일어날 수 없다. 생존에만 집중한다면 미래를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를 위한 자기 혁명은 주어진 자기 조건을 냉철하게 진단하고 그것을 바꾸겠다는 청사진을 가져야만 한다.

예술가를 정의하는 첫 번째 요소는 분명한 자기 개념, 즉 자신이 예술가라고 느끼고, ‘예술을 직업이 아니라 삶의 방식으로 간주해야 한다.’ 직업인은 배워서 살아가지만, 예술가로 살아간다는 것은 날마다 자신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 일종의 생활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발견한 것들을 미술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산을 오르다 보면 넘어질 수 있다. 산에 걸려 넘어지는 게 아니라 돌에 채여 넘어진다. 보조국사 지눌은 “우리는 넘어진 곳에서 일어나야만 한다.”고 했다. 넘어졌으면, 그곳에서 청명한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서 잠시 쉬어도 좋다. 하지만 일어나기 위해서는 넘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걸어야만 산을 넘을 수 있다.

이문수<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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