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추의 시간, 하늘과 땅과 인간의 무늬
만추의 시간, 하늘과 땅과 인간의 무늬
  • 이귀재
  • 승인 2016.11.16 17: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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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 산책길마다 가을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을 밟는다. 노란 낙엽에 울긋불긋한 은행 나뭇잎이 눈부시다. 사뭇 계절의 오묘함을 새삼스럽게 느낀다. 이것이 시간의 흐름을 아쉬워하지 않고 반기는 즐거움인 듯하다.

어릴 적 남원 종가의 종손으로서 할아버지한테 무릎 꿇고 배웠던 ‘문(文)’이라는 한자가 생각난다. 이 글자는 글월 문(文)이라고 새겨지지만 ‘무늬’라는 뜻이 더 강하다.

하늘에도 무늬가 있으니 천문(天文)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우주론적 질서가 가을 빛깔처럼 지상에 내려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드러난다. 우주와 도(道)의 무늬가 땅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니 지문(地文)이다. 가을을 빗대어서 풀어보면, 아름다운 조화의 우주 질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땅에서 곱고 예쁘고 울긋불긋한 가을 풍경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라고 그 빛깔과 무늬에서 어찌 벗어날 수 있겠는가? 바로 조화로운 기운과 아름다운 채색이 인간에게도 머문다. 하늘과 땅에서 생겨 인간에 채색되는 무늬가 바로 인문(人文)이다. 인간의 무늬는 도덕과 윤리적 품성으로 도(道)라는 우주론적 질서를 지상에서 실천하라는 명령이기도 할 것이다. 아침 산책길에 이런 무늬를 생각하면 가을 하늘과 땅 사이에서 나 자신도 가을의 무늬로 환한 빛깔로 다시 태어나는 것 같다.

언젠가 공대 모교수를 만나서 이런저런 담소를 나눴다. 이야기 도중에 자신은 우직하게 연구하는 공돌이라고 겸손해했다. 그러기에 무슨 말이냐고 화들짝 놀라면서 공(工)이라는 단어는 내 생각에 이럴 것이라고 해석해주었다. 먼저 공(工)이라는 한자의 첫 번째 획인 일(一)은 하늘이며, 제일 아래의 일(一)은 땅을 의미한다.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곤(?)은 사람을 의미한다. 결국 공(工)은 하늘과 땅의 이치를 탐구하여 세상만사를 조화롭게 하고 인간에게 유용한 결과물을 얻기 위해 연구한다는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그래서 공학은 자연과 땅의 이치를 탐구하는 선택받은 학문이라고 말했더니 그 교수는 공(工)이라는 단어에 그렇게 심오한 의미가 들어있는 줄 몰랐다고 하면서 함께 웃었다.

진짜로 가을의 무늬는 많을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봄에 자라난 나뭇가지와 잎들이 왕성한 여름을 거쳐서 다시 가을의 채색으로 이어지고 마침내 모든 것을 떨어뜨리고 앙상한 나무줄기로 겨울을 지낸다. 태어나 자라고 피고 지고 다시 다음해를 기약하는 시간의 순환이 어김없이 자연의 법칙처럼 존재한다. 이것도 인간세계에 적용되는 생물의 진화이다. 모든 만물은 시작과 끝으로 순환의 시간을 다하고 다시 끝은 시작으로 이어지면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간다. 산을 감싸는 숲은 겉으로는 항상 여전히 그 모습인 것 같아도 안을 들여다보면 거목은 언젠가 사라지고 그 밑에 있는 작은 나무들이 새롭게 숲을 만들어간다.

아무리 훌륭하고 경쟁력 있는 대기업이라도 시작과 끝이라는 라이프 사이클의 진화론을 거스를 수는 없다. 내적으로 끝없이 생명을 다하는 기술을 폐기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 기업이라는 숲의 생태계를 만들어 가야 한다. 진화론의 법칙을 외면하면 숲이나 기업도 예외 없이 도태될 것이다. 정치권력이라고 어찌 냉엄한 진화의 흐름을 벗어날 것인가.

공부하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우주론적 질서를 도덕과 윤리적 사명감으로 실천하고 자연과 사물의 이치를 탐구하여 서로 공생하고 보다 조화로운 삶이 이뤄지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홀로 존재하지 않고 더불어 숲이 되고 함께 살아가는 것도 자연의 질서에 들어맞는 일이다. 새로운 기술과 지식을 끊임없이 탐구하여 세상에 유익한 것을 보태고 더 나은 세계를 창조하는 것도 포함된다. 하늘의 빛깔이 땅에 내려와 온 세상을 채색하고 나 자신도 거기에 물들어 하나 되는 일이 인간의 무늬, 바로 인문(人文)정신이 아닐까 생각해보는 늦가을 아침이다.

이귀재<전북대학교 생명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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