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몰랐다는데..
모두가 몰랐다는데..
  • 장상록
  • 승인 2016.11.09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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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다. 당시 국민학교에서 보이스카웃 활동을 하던 내가 김제에 갈 일이 생겼다. 이유는 귀한 분이 오시는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새마음봉사단’ 박근혜 총재를 맞이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뒤 상황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다. 2004년 국회에서 인턴보좌관 생활을 할 때 근무했던 의원회관 5층에는 박근혜 의원 사무실도 있었다.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그와 마주칠 때 마다 느끼는 감회가 남달랐던 것도 어린 시절 기억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는(?) 내 눈엔 ‘아버지가 워낙 유명한 분이니까..’ 정도의 생각 뿐 이었다. 여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린 시절 그를 환영하기 위해 줄 서있던 아릿한 기억정도일 것이다. 그가 정말 대한민국 대통령 자리에 오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온 나라가 충격에 빠져있다. 현직 대통령을 둘러싸고 벌어진 논란을 ‘공화국과 여왕의 불화’ 정도로 치부했던 것도 결코 가볍다 할 수 없지만 더욱 충격적인 것은 현 시점까지 밝혀진 것만으로도 공화국이란 말을 의심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 데 있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한 것이 있다. 상황이 이렇게 될 때까지 정말 모두가 몰랐단 말인가. 만일 누가 그렇다고 대답한다면 그것은 코미디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민망한 비겁한 변명이다.

적어도 최태민이라는 인물은, 5공 시절 일개 대학생에 불과한 나도 알고 있던 이름이다. 그와 관련된 여러 의혹과 우려는 이미 수 십 년 전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안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그 당시 이미 오래된 미래였는지 모른다. 다시 묻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점은 과연 무엇에 관한 것인가. 적어도 이 문제에 관한 한 정치인과 언론이 할 수 있는 얘기는 거의 없다. 지도자를 선택하는 것은 국민이지만 국민이 올바른 기준을 가지고 옥석을 골라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정치인과 그들을 감시하고 검증해야 할 언론의 몫이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제대로 이뤄졌는가. 파국이 예정 된 미래에 대한 고의적인 무시가 아니라면 설명할 수 있는 논리는 암묵적 묵인과 방조라고 밖에 할 수 없다.

앞선 몇 몇 대통령을 포함한 많은 남성 정치인들이 여자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시대적 과도기에 따른 일로 이해했다. 또 하나가 있다면 정치인에 대한 공격에도 금도가 있다는 것이리라. 그것이 여성이라면 더욱 신경 쓰이는 부분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일까. 대통령이 되기 위해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는 혹독한 검증과정에서 누구도 이 부분을 공식화하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 시절 박지만, 박근령 형제가 작성한 탄원서나 당시 민정수석실에서 대통령에게 보고한 내용을 보면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여기서 문제의 본질은 입에 담기에도 민망한 최태민과의 관계에 대한 호기심이 아니다. 공인의 사생활에 관한 부분이 공적인 부분과 연계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보호해줘야 한다. 문제는 대통령의 사생활이 공적영역을 무력화하고 권력을 사유화했다는데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국사 1126년의 공백을 깬 여성지도자다. 그 이전 마지막 여왕은 887년 즉위한 진성왕(眞聖王)이다. 진성여왕 이후 한국사에 더 이상의 여성지도자는 없었다. 적어도 박근혜 대통령 이전까지는. [삼국사기]에는 진성여왕에 대해 이런 기록이 있다.

“이후부터는 몰래 아름답게 생긴 소년 두세 사람을 끌어들여 음란한 행위를 하였고, 그 사람들을 중요한 직책에 앉히고 나라의 정책을 위임하였다. 이로 인하여 아첨하는 무리가 방자하게 뜻을 펴고 뇌물이 공공연하게 행해졌으며 상과 벌이 공평하지 않아, 기강이 무너지고 해이해졌다.”

여기서도 문제는 왕의 사생활이 아니다. 진성왕은 897년 이런 말을 남기고 왕위에서 물러난다.

“근년 이래 백성이 곤궁하고 도적이 벌떼처럼 일어나니, 이는 나의 부덕한 탓이다.

어진 이에게 왕위를 넘겨주기로 나의 뜻은 결정되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삼국사기, 진성왕 본기]만은 읽어봤어야 한다. 자신의 오래된 미래였으니.

장상록<예산군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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