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시와 미시 사이
거시와 미시 사이
  • 홍용웅
  • 승인 2016.11.02 17: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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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제현상을 거시경제와 미시경제로 대별하는 것이 경제학의 오랜 전통이다. 거시경제는 국가 전체의 경제운용이라는 큰 그림에, 미시경제는 개별소비자 복리에 초점을 둔다. 마치 숲과 나무의 관계와 같아서 양자는 확연히 다른 현상이지만 내용적으로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다. 바라보는 관점 또한 달라 거시는 ‘새의 눈’으로, 미시는 ‘벌레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학교에서 가르친다.

문학작품에서도 거시와 미시는 상호작용한다.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소설의 하나로 손꼽히는 톨스토이의 <안나카레리나>는 이렇게 시작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 이유가 있다.’ 이 유명한 거시적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톨스토이는 약 2천 쪽의 방대한 분량을 등장인물의 미시적 삶들을 그리는데 바친다.

바둑에도 대국과 소국이 있으니, 이중 어느 하나에 소홀하면 패국으로 귀결된다. 착안대국 착수소국(着眼大局 着手小局)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처럼 인생살이의 매사는 거시와 미시 사이에서 결단과 균형을 요구한다. 생각하는 갈대인 인간은 그 간극을 시계추처럼 오간다. 여기에 리더들의 고뇌와 비극이 있다. 많은 지도자가 거시에 치중한다. 대국(大局)적 사고가 리더십의 알파요 오메가라 여긴다. 그러나 악마는 디테일에 있으니 사건 사고는 화날 만큼 극히 사소한 일 때문에 발생한다. 미시적 원인이 엄청난 거시적 후폭풍을 초래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지도자로서는 통탄할 노릇이다. 너무 희극적이라서 비극적인 작금의 국정농단 사태 역시 마찬가지니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도 못 막게 생겼다.

전북경제통상진흥원은 그 이름만으론 도의 경제와 통상이라는 거시문제를 다루는 조직처럼 보인다. 그러나 실제 집행하는 업무의 속내를 들여다보면 매우 미시적이다. 하지만, 미시의 궁극적 지향은 거시여야 한다. 미시로 거시를 지탱한다고나 할까? 그동안 큰 그림에 대한 의식 없이 사업의 세부 집행에만 함몰됐던 것은 아닌지 자문해 본다.

진흥원의 16년 역사 속에 밴 직원들의 신산한 노고를 무시하자는 건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간 죽기 살기로 노력해온 근본 이유에 대한 각성이 없다면 헛일이다. 우리는 왜 존재하는가? 답은 하나, 바로 ‘고객’이다. 그러나 집합명사로서의 고객을 위한 포괄적 만족이란 하나의 개념일 뿐 실재하지 않으며, 만약 있다면 개개 고객만족의 총화에 불과하다. 고객을 집단으로 여겨 붕어빵 찍어내듯 획일적 응대를 하고 있진 않은지 업무방식의 자기점검과 반성이 그래서 더 필요하다.

숫자와 문서로 대변되는 영혼 없는 행정을 지양하고 고객 개개인의 사정과 고뇌를 살펴서 보듬어야 한다. 고객과 눈을 맞추고 정감을 나누어야 한다. 거기서 신뢰가 쌓이고 만족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전 직원이 중소기업, 소상공인 현장을 누비려는 근본취지도 바로 여기에 있다. 좀처럼 호전되지 않는 경제여건 속에서 도내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게 자그만 희망과 용기라도 드릴 수 있길 바라면서 오늘도 우리는 고객을 찾는다.

요즘 들어 부쩍 싸늘해진 날씨는 추운 겨울이 임박했음을 예고한다. 유난히 바람 많은 팔복동에 터 잡은 경진원 청사에 인간적 온기가 충만하길 기대한다.

홍용웅<전북경제통상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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