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증편향
확증편향
  • 장상록
  • 승인 2016.10.2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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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테네에서 호의동승 했던 차량 운전자가 흑인이었음을 얘기했을 때 듣고 있던 대부분은 이렇게 말했다. “어쩌려고 그런 위험한 행동을 했어요?” 그들의 걱정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낯선 곳에서 정확히 파악되지 않은 사람의 호의는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위험의 정도가 호의를 베푼 당사자가 흑인이어서라면 어떨까. “흑인은 무섭다.”, 누군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미국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 대부분은 흑인이다.”, “흑인 밀집 지역은 치안 공백지대다.” 그들은 흑인이 왜 무서운 존재인지에 대한 많은 자료를 제시할 것이다. “테러리스트는 무슬림이다.”라는 단정은 어떠한가. 누군가의 말처럼 “무슬림 모두가 테러리스트는 아니지만 테러리스트는 어김없이 무슬림이다.”라는 근거를 증명하기 위해 그가 수집하는 정보

또한 그것을 충분히 뒷받침할 수 있을 것이다. 과연 그들이 제시하는 정보를 어떻게 볼 것인가.

모든 정보는 선택성을 가진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에 있다. 정보가 자신이 믿는, 보다 적확(的確)하게는 믿고 싶은 것을 합리화 하는 수단이 될 때 이미 정보는 객관성을 상실하게 된다. 이른바 확증편향은 개인에게도 그렇지만 그것이 정권을 담당한 주체에게 반영될 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정권의 비선조직이 그렇다.

“창문이 구름을 밀치는 저녁, 함지가 해를 떠받드는 가을, 벽 년 동안 이 모임을 길이 하리니, 덕과 함께 복도 함께 하리라.” 동덕회(同德會)라는 조직을 위해 써준 정조(正祖)의 시다.

동덕회는 정조가 세손 시절부터 함께한 정치적 동지들이 주축이 된 사조직이다. 정조는 세손 시절 노론(老論) 벽파(僻派)로부터 끊임없는 위협을 받는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홍인한(洪麟漢)이 영조(英祖)를 면전에 두고 한 이른바 세손 삼불가지론(三不可知論)이다. 세손 신분인 정조는 물론 노쇠한 영조마저 농락한 홍인한의 이 발언은 실록에 명백히 남아 있다.

“세손은 누가 노론인지 소론인지 알 필요가 없고 이조판서나 병조판서에 누가 좋은지도 알 필요가 없으며 조정의 일은 더더구나 알 필요가 없다.” 왕조시대에 신하가 왕 면전에서 한 얘기로 믿어지는가. 이때 홍인한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 인물이 서명선이다. 동덕회는 바로 그 2년 후가 되는 날 결성된다. 동덕회에는 후일 세도정치의 첫 주자로 거론되는 홍국영도 포함된다. 특이한 것은 동덕회는 당색도 초월했다는 것이다. 김종수와 홍국영은 노론, 서명선과 정민시는 소론이었다.

이 모임은 정조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된다. 정조가 이 구성원들에게 가졌던 애착의 정도는 홍국영이 효의왕후 독살음모를 꾸몄음에도 역적 처분을 내리지 않고 목숨을 보전해준 것만으로도 잘 알 수 있다. 정조는 이렇게 말한다. “군왕이 현명한 신하와 사적인 정을 쌓아야 큰일을 이룰 수 있다.” 비선조직은 정권 담당자에겐 자연스러운 존재인지 모른다. 나폴레옹도 20대 젊은이들로 이뤄진 ‘방향성 있는 망원경’이라는 비선조직을 통해 군의 정식보고 체계를 보완했다.

문제는 리더가 비선조직에만 전적으로 의존할 때 나타난다. 대표적인 것이 명(明)나라 멸망을 초래한 결정적 요인 중 하나로 거론되는 환관(宦官) 정치다.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정보는 그 자체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은 거짓을 선동하는 도구일 뿐이다.

고향이 전라도라는 내게 극도의 증오심을 가지고 ‘전라도놈들은 다 사기꾼이다’라며 들이대는 그들의 근거 하나 하나를 과연 제대로 된 정보라 할 수 있겠는가.

증오에 가득한 그들 입에 전라도 대신 흑인과 무슬림을 넣어보자. 그럴듯하지 않은가.

나치의 유태인 학살이나 코소보 등에서 자행된 인종청소는 또 어떠한가. 그들이 제시하는 근거를 살펴본 적 있는가. 당신이 상상하는 이상으로 그들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근거들이 많다.

정조와 나폴레옹의 비선조직이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던 것은 확증편향의 덫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 문제가 된 한국 지도자의 비선조직은 확증편향이란 이름을 거론하기에도 민망하다.

장상록<예산군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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