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벽골제, 농경문화의 가치 그 미래를 그리다
김제 벽골제, 농경문화의 가치 그 미래를 그리다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6.10.18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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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고대 문명의 세계유산이다<7>

(재)전북문화재연구원은 매년 벽골제 발굴조사현장에서 일반 대중과 학생을 대상으로 사회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전북문화재연구원 제공)

 본보는 지난 8월부터 10월까지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상징이자 심장으로 평가받는 김제 벽골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이야기를 담았다. 그동안의 취재 내용을 바탕으로 내린 결론은 김제 벽골제의 가장 중요한 가치는 여러시기를 관통해 얻은 기술의 총체라는 것이다. 백제시대에 축조해, 태조때 중수를 하고, 일제 강점기엔 무참하게 파괴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으나 시대를 관통하면서 벽골제 제방에는 김제 사람들의 삶의 애환이 켜켜이 쌓여만 갔다. 인간 스스로 자연을 극복하고 인위적으로 물 관리를 가능하게 했던 불굴의 개척정신을 보여준 산 증거인 셈이다. 이제는 그 상징성을 넘어 벽골제의 원형을 어떻게 잘 보존해 후대에 물려주고, 또 어떻게 스토리텔링하고 제대로 알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남는다. 이번 특집 기사를 마무리하면서, 김제 벽골제가 지닌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다시 한 번 되새기고, 그 바람직한 활용 방안은 무엇이 있는지 정리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김제 벽골제가 지니고 있는 탁월한 가치는 다음과 같다.

벽골제는 그 역사성은 물론이거니와 첨단의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으며, 한·중·일 삼국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면서 그 국제성을 인정 받았고, 지방통치의 경제적 기반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

먼저, 그 역사성으로 보자면 벽골제의 축조는 백제의 중앙세력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 김제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마한세력에 의해 최초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곧 벽골제 축조의 주인공들은 김제를 중심으로 삶을 영위했던 우리 선조들임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또 엄청난 규모의 벽골제 제방을 만드는데 쓰인 당시의 토목 기술력은 오늘날 새만금 방조제나 서산 간척지와 비교되는 엄청난 토목공사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기록에 의하면 330년 처음 벽골제가 축조되었을 당시 규모가 1,800보라고 적고 있지만, 이후에 중수하는 과정에서 좀 더 확장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실려 있는 ‘벽골제중수비문’에 따르면, 제방의 높이는 5.23m, 하변의 폭은 21.5m, 상변이 9.24m라고 되어 있는데, 현재 남아 있는 제방의 길이는 무려 3㎞에 달한다.

벽골제는 축조공법에서 국제성을 인정받고 있다. 누수로부터 제방이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먼저 최하단에 식물부재를 까는 벽골제의 부엽공법은 오사카의 사야마이케의 제방 축조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밝혀져 일본 고대 제방축조기술의 원류가 바로 김제 벽골제라는 점에서 학계간의 연구가 활발하다. 수문의 형태 역시 1400년대에 조성된 원나라 수문인 지단원원대수갑유적과 매우 비슷한 구조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곧 중국, 한국, 일본이라는 동아시아적 확산 루트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벽골제의 국제성을 입증하고 있는 셈이다.

여기에 벽골제를 이용한 농업 생산력은 매우 높았을 것이라는 결론이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은 이 지역을 중심으로 정치적 집단이 성장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학계에서는 김제 벽골제가 정읍 영원면 일대의 분구묘를 축조한 집단의 경제적인 배경이 됐고, 부안 백산성은 유통의 거점으로 당시 이 일대의 풍요하고 강성했던 지방세력이 존재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 같은 탁월한 가치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고고학적 성과만으로는 벽골제 온전한 모습을 밝히기에 부족함이 많은 것이 현실이다. 1925년 일제강점기 간선수로의 개설로 제상사면부가 파괴되어 본래 형태를 알 수 없으며, 현재도 간선수로가 사용되고 있어 제방 단면의 전체적인 모습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유물이 거의 출토되지 않아 축조방법과 절대연대에 의존해 초축시기를 가늠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벽골제의 초축집단, 배경시기와 기능에 대해 학계에서는 여전히 다양한 의견이 제시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인데, 그 성격에 대해서도 논란의 불씨는 여전하다. 벽골제의 조사를 맡고 있는 (재)전북문화재연구원이 최근 초축제방과 보축제방의 조사와 함께 이뤄진 자연과학분석을 통해 초축제방 축조 당시 제방 인근에는 해수의 영향이 없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제방의 안쪽과 바깥쪽까지 전체적인 현황을 파악하기에는 그 한계점이 분명하다.

이는 두 지점의 수문과 중심거에 대한 발굴조사만 이뤄진 상태에서 관련 논의들이 현상적인 측면으로 접근돼 이뤄져왔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벽골제의 세계문화유산 등재 추진이 탄력을 받기 위해서는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고고학적 발굴조사가 필수적인 것으로 지적된다. 그 과정에서 유구 조사는 물론, 문헌자료에 대한 세밀하고 종합적인 검토가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의 수로나 수문과는 약간 떨어진 지점을 최소 3~4개 지점을 절개 조사해 축조 관련 자료를 확보해야할 것이라는 지적이다.

다행이도 김제시는 벽골제 발굴 조사 및 정비를 위해 동진강 지류인 벽골제 용수로를 북쪽으로 옮기는 작업을 진행중이며, 물길이 옮겨가는 2020년부터 둑의 원래 규모와 축조 기술, 수문 5개의 구조 등의 조사도 본격화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보다 앞서 빠르면 올해 말부터는 유통거쪽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질 예정으로, 어떠한 결과들이 도출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물론, 고고학적 연구에 발맞춰 역사적, 농업적, 무형적 연구도 유기적으로 연계되여야하는 것은 필수다.

 세계문화유산이란 한 국가나 한정된 지역의 문화유산을 뛰어넘어 세계의 온 인류가 공유해야 되는 매우 중요한 유산을 의미한다. 등재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잘 보존해 다음세대에 잘 물려주어야하는 강력한 의무도 뒤따른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김제 벽골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위한 일련의 작업들을 착실하게 진행하고 있는 것일까?

지난 16일 방문한 김제 벽골제의 모습은 10여 년 전과는 많이 달라 보였다. 김제 벽골제를 관광자원화하고 널리 알리고자 하는 김제시의 의지만큼이다 각양각색의 부대시설이 늘어선 모습이었다. 시민들의 여가와 관광객들의 볼거리를 위한 것이라 하더라도, 사실상 우려스러운 점도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실제, 단편적으로 인기에 매몰돼 가볍게 조형물을 만들어 장식하는 일은 세계문화유산의 길을 더디게 만드는 과오를 범하는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향후 벽골제에 대한 훼손이 더 심해지기 전에 부대시설을 늘리는 것은 지양하고 제대로 된 발굴조사를 기본으로, 원형에 가까운 복원에 힘써야한다는 목소리에 힘이실리고 있다.

김제 벽골제를 대내외적으로 홍보하는 방법적인 면에 있어서도 즐기면서 노는 관광형태에만 집중하기 보다는 진지한 형태의 프로그램도 필요해보인다. 예를 들어 일본 사야마이케는 발굴조사를 3년 넘게 진행하고 나서 1년에 한번씩 시민들을 불러모아 견학회를 진행했다고 한다. 사야마이케가 오랜기간 시민들에게 사랑받았던 곳인 만큼, 발굴된 성과들을 자주 보여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고,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를 위해서는 시민들에게 유적의 가치를 제대로 알리는 일도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현재 김제 벽골제 제방에서도 관련 교육 사업들이 이뤄지고 있지만, 비공식적이고 간헐적으로 이뤄지고 있어 아쉬움이 크다. 벽골제를 제대로 알리는 것 또한 김제, 나아가 전북의 의무다. 벽골제는 김제시와 시민의 것만이 아닌, 우리나라는 물론 동남아를 비롯한 도작문화권에서 아주 귀중한 문화유산임을 인식해야할 때가 지금이다.<完> 김미진 기자

◆자문위원 최완규((재)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원광대 교수)

성정용(충북대 교수·한국상고사학회 회장)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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