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찾는 벽골제 수문의 비밀
중국에서 찾는 벽골제 수문의 비밀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6.10.12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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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고대 문명의 세계유산이다<6>

중국 상해원대수갑유지박물관(上海元代水閘遺址博物館·Shanghai Yuan-dynasty Water Gate Museum) 전경 (김미진 기자)

 올 3월, 국내 최고, 최대의 고대 수리시설 유적으로 널리 알려진 김제 벽골제(碧骨堤)에 대한 깜짝 놀랄만한 소식이 전파를 탔다. 전북문화재연구원(이사장 최완규)이 벽골제 6차 발굴조사를 통해 제방에 물길을 트던 수문이던 중심거(中心渠)의 터 전체를 발굴해 확인한 형태와 구조, 축조방법을 발표한 것이다.

중심거는 2012년에 처음으로 찾아냈던 벽골제의 핵심수문이다. 16세기 나온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벽골제에는 수문 다섯 개가 있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는데, 현재 시설이 남아있는 것은 장생거·경장거 뿐이었던 만큼 당시 확인된 내용들은 매우 의미가 컸다.

특히 중심거에서 확인된 수문의 형태는 중국 상해 오송강(吳松江) 하구부에 위치한 지단원원대수갑유적(志丹苑元代水閘遺跡)과 유사하다는 설명도 덧붙여졌다. 그렇다면, 지단원 유적에서 벽골제 수문의 비밀을 좀 더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그 비밀의 열쇠를 찾기 위해 지난 9월 17일 방문한 중국 상해원대수갑유지박물관(上海元代水閘遺址博物館·Shanghai Yuan-dynasty Water Gate Museum)을 찾았다. <편집자주> 


 지난 2013년 1월 1일 정식 개관된 박물관은 중국 고대 수리유적에 대한 가치와 의의를 전달하는 공간으로 일반인들에게 개방돼 있었다.

박물관 내부에 진입을 하니 우선 수문의 외부 경계를 둘러싼 유리바닥을 따라 마치 산책하듯 내부를 돌아볼 수 있도록 구성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관람객들이 다양한 각도에서 고대 수문의 구조를 살펴볼 수 있도록 배려한 안정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또 다양한 패널과 영상 등의 자료를 통해 수문의 고고학적 성과에 대한 개요부터 만들어진 과정과 기법, 수문의 구조, 관련 유물 등을 전시해 관람객들의 이해를 도왔다.

지단원원대수갑유적은 중국 상하이 푸퉈 구 지단로와 연장서로가 교차하는 곳에 자리하고 있다.

지난 2001년 이 일대에서 18층 높이의 건물을 짓기 위한 건축공사가 진행이 됐는데, 7m 아래 부근까지 땅을 파 내려가던 도중에 딱딱한 물체가 닿아 더 이상 내려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곳에서는 두 개의 은촉홈으로 병합된 청석판이 발견됐다.

 중국 고대의 대표적인 수리 프로젝트로 거론되는 대단한 발견, 그 서막이 오른 것이다.

 지난 2002년과 2006년, 2012년까지 총 3번의 발굴을 통해 밝혀진 수갑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수갑유적의 전체 평면은 직사각형으로 동서 길이 47m, 남북 길이 35m, 총면적은 1,600㎡에 이른다. 그중에서도 갑문은 수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2개의 큰 청석 문주로 구성되어 있다. 수갑의 중심에 우뚝 서 있어 물길이 이곳을 거쳐 출입한다. 두 개의 문주 사이의 길이는 6.8m이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목판, 나무문턱, 청석판이 있으며, 나무 문턱에는 나무로 된 핀까지도 완전하게 보존이 돼 있다.

 이에 따라 다수의 권위 있는 전문가들과 학계의 반복적인 논쟁을 통해 보존상태가 가장 좋은 원나라 시대 때 수갑 유적으로 평가했다. 특히 원나라의 문헌 기록과 일치하면서 매우 중요한 사례로 꼽혔다. 이미 발굴된 비슷한 유적들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제작기술까지도 월등해 지난 2007년 4월 7일에 이 유적은 2006년 ‘전국 10대 고고신발견’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지단원원대수갑유적은 1400년대에 조성된 원나라 수문으로, 1415년에 크게 보수된 벽골제와 비슷한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유사한 점을 찾을 수 있었다. 일단 전체적인 형태가 매우 비슷한데다, 갑문의 구조가 깊게 들어가면서 석주를 세우고, 목판이 물을 막았다가 여는 형태 등 유사한 점이 많았다.

 특히나 두 유적이 비슷한 시기상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학계의 관심은 비상하다. 제방 뿐 아니라 석조 수문에서도 중국, 한국, 일본이라는 동아시아적 확산 루트를 살펴볼 수 있다는, 그 가설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원대 지단원의 수문을 벽골제와 유사한 형태로 보는 학계의 시각은 비단 한국에만 그치지 않는다.

 일본 나라대학 고야다마 고이치 교수는 지난해 김제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벽골제 수문은 지단원갑문을 축소한 형상으로 八자형으로 열리는 호안 형상은 중심거의 호안과 유사하다”면서 “현재 확인되는 벽골제 수문은 태종 15년 수축 후의 형상이지만, 여기서는 중국 강남지역에서 발달한 석조수문 기술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초 김제에서 열린 학술심포지엄에 참여한 중국 상해박물관 하계영 연구원도 김제 벽골제를 관람한 후, “원대 수갑을 보면 두 개의 큰 축석 석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것이 벽골제의 석주와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고 의견을 보태기도 했다.

 지단원 수문이 발견된 오송강은 상하이 주요 하류중의 하나였다. 원나라때 오송강이 막히느냐, 막히지 않느냐, 홍수가 발생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에 따라 중국의 식량, 세금에 직접적인 연관을 끼쳤다고 한다. 오송강의 물막힘이 매우 심각하다보니, 조정에서는 오송강의 막힘을 해결하는데 매우 큰 공을 들였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이 수문이 활용된 그 역사는 짧다. 대략 20년 정도 사용되다가 이 지역 일대에 큰 홍수가 나버려서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현재와 같은 지형으로 육지화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고귀한 유적이 땅속에 고이 묻혀 있다가 21세기에 세상밖으로 얼굴을 드러낸 일은 신비롭기까지 하다.

 물 없이는 생명도 없다. 그러나 물이 넘치면 모든 생명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것 또한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국토 면적이 넓고 지형도 매우 복잡한 중국의 고대인들은 그야말로 살아남기 위해 물과 싸웠다. 고대 중국인들은 수천 년동안이나 끊임 없이 반복되는 가뭄, 홍수 등의 재해에 대비해오면서 수리체계를 구축하기도 했지만, 강과 호수와 같은 지형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경제의 부흥에도 힘썼던 셈이다.

 중국 상하이 = 김미진 기자

 
 ◆자문위원 최완규((재)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원광대 교수)
  성정용(충북대 교수·한국상고사학회 회장)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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