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대 수리유적의 보존과 활용사례 - 사야마이케 저수지
일본 고대 수리유적의 보존과 활용사례 - 사야마이케 저수지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6.09.27 17: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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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고대 문명의 세계유산이다<4>

일본 오사카사야마시 중심에 위치한 사야마이케 주변에는 1300여 그루의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매년 봄이면 그야말로 눈부신 풍광을 그려낸다. (사야마이케박물관 제공)

 일본 오사카부 남쪽에 자리한 오사카사야마시. 면적은 11.86km², 인구 5만8천여명 정도의 소도시이지만, 저수지의 도시로 유명세를 떨치고 있는 곳이다. 시 중앙부에 위치한 사야마이케(狹山地)는 오사카사야마시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공간이다. 이 저수지는 이 지역 사람들의 생활과 더불어 변화를 거듭하는 모습을 그대로 담아내 역사의 그릇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백과사전에서나 볼 수 있는 박제된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이어지고 있는 과거의 면면, 그리고 미래까지도 가늠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특히 사야마이케는 유서 깊은 고대 수리시설을 어떻게 보존하고, 계승하며, 활용해야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에 답을 제시해주는 가장 바람직한 사례로 손꼽힌다. 이번 보도에서는 사야마이케의 발굴과 연구 성과를 중심으로, 사람과 사람의 끈으로 이어져 여전히 사람과 공생하고 있는 문화유산으로써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자 한다. <편집자주>

지난 1988년 사야마이케의 제방을 더 높이 쌓으려는 보강공사 과정에서 깜짝 놀랄만한 역사적 사실이 세상에 얼굴을 드러냈다. 일본에서 현존하는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제방의 모습이 공개되면서 학계는 물론, 이 연못을 사랑했던 지역민들 역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1400년 전, 아스카 시대의 물 부족 문제를 해소하는 동시에 농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국가적 사업으로 사야마이케가 탄생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당시 이 일대는 해수가 유입돼 저습한 곳이 많았고, 천의 범람으로 상습 침수구역도 많아 인간이 거주하기에는 불리한 여건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5세기 이후 한반도에서 특히 백제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하면서 이 주변은 몰라보게 달라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 지난 8월 중순 방문한 사야마이케의 모습. 이 저수지는 시민들의 안식처이자 휴식처로 사랑받고 있으며, 시민들은 이곳에서 사야마이케를 사랑하고, 지키고, 미래에 전하기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이어가고 있다. (김미진기자)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야마이케가 백제인들의 손끝에서 탄생한 유적으로 평가된다는 점이다. ‘일본서기’스이코(推古) 12년(602년) 10월조에는 “백제 승려 관륵이 내조(來朝)해서 역본(曆本), 천문지리서, 둔갑방술서(遁甲方術書)를 바쳤다”고 기술돼 있다. 기후과 농사에 관련된 내용부터 토목공사에 필요한 면적계산과 측량기술까지 담은 교재가 포함된 서적이 백제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것.

특히 사야마이케의 축조방식이 전북 김제 벽골제의 그것과 너무도 닮았다는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해준다.

지난 1989년부터 1993년까지 계속된 사야마이케 발굴조사 결과 축조된 제방은 나뭇가지와 낙엽을 바닥에 깔면서 성토하는 부엽공법(敷葉工法)이 사용된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김제 벽골제의 축조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 또 제방 동쪽 끝에서 발견된 축조 당시에 설치됐던 통관의 그 연륜연대를 측정한 결과 616년에 축조된 사실이 밝혀져 한반도에서 건너온 기술임을 뒷받침해주기도 한다.

특히 사야마이케 제방은 처음 축조됐을 때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개수의 역사가 축적돼 시대별로 다양한 기술이 쌓이고 쌓여 1400년이라는 역사를 관통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각 시대마다 저명한 인물들에 의해 국가적 규모의 개수가 거듭되어 온 사실이 증명되고 있음은 물론, 저수지의 크기도 시대별로 확대돼 그 위상이 높아져 갔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당대의 첨단 토목기술과 막대한 사회 자본이 투입되었던 사례라고 볼 수 있는 셈이다.

 실제, 731년 나라시대의 승려 쿄키(行基)는 농민구제 사회사업의 일환으로 사야마이케의 대대적인 개보수 공사를 주도했다. 백제 왕인 박사의 후손으로 가난하고 어려운 민중들을 위해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줘 일본에서도 살아있는 보살로 평가되는 그의 발자취를 사야마이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또 1201년 카마쿠라시대에는 승려 쵸겐(重源)이 65.4m의 석관을 재활용해 송수관을 만들었다는 사실이 전해진다. 쵸겐의 개수 공사를 기록한 비석이 연못 안에서 발견되면서 공사의 전체 내용을 알게됐다는 사실이 흥미로운데, 이 비석에는 많은 사람들이 개수 공사에 참여했다고 새겨져 있다. 역사상 되풀이 된 개수공사에는 엄청난 인력의 손으로 가능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대목이다.

그런가하면, 1608년 에도시대의 초기에는 무사 가타기리 가츠모토(片桐且元)에 의해 개수가 이뤄진다. 그는 제방 중앙에 중통, 서쪽 끝에 서통, 동쪽 끝에 동통 등을 설치해 사야마이케의 재생에 힘쓰는 한편, 제방붕괴방지를 위해 목제버팀틀을 설치했다. 이에 따라 축조당시에는 길이가 300m였던 제방의 길이가 600m에 이르고, 저수량 250만톤, 수혜면적은 4200ha까지 비약적으로 확대되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중통과 서통에 척팔통으로 불리는 새로운 취수방식이 적용됐다는 점이다. 이는 상하 4단의 단계적 취수방식으로, 우선 1단을 열어 물을 흘려보내고 수위가 낮아지면 다음의 취수구를 순서대로 열어서 바닥의 물을 흘려보내는 매우 합리적인 방식이라는 설명이다.

세월의 여러 부침 속, 아스카 시대부터 진화를 계속해온 사야마이케는 고고학의 연구 성과 뿐 아니라, 일본의 토지 개발의 역사를 대표하는 토목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그야말로 한국과 중국을 사이에 두고 관련 연구를 위한 중요한 존재로 우뚝 서 있는 모습으로, 견주어 볼 수 있는 학문의 범위 또한 고고학, 건축학, 기하학, 환경학, 인류학 등 방대해 그 가치의 확장은 어느 정도 수준까지 이뤄질지 예견하기 힘들 정도다.

이러한 사야마이케의 유구한 역사를 일찌감치 알아본 이는 바로 오사카 사야마시 출신의 고고학자인 스에나가 마사오(末永雅雄) 박사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80여년 전의 개수공사 때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사야마이케에서 출토된 석관을 보호하는 일에 사비를 들여서 앞장섰다. 그리고 자신의 저서 ‘연못의 문화’를 통해 문화유산으로서의 사야마이케에 대한 중요성을 처음 언급해 주목을 받았다. 그 또한 사야마이케가 이렇게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공간이 될 것이라고 예상 했을까?

무엇보다 사야마이케가 주목받는 이유는 사람들의 생활과 더불어 변화하고, 현재도 살아 숨쉬는 유적이기 때문이다. 농업의 비중이 줄어든 현대에 와서는 과거 효용성은 줄어든 대신 시민들에게 휴식을 제공하는 도심지 공원으로서 역할을 해내며 여전히 사랑받고 있는 모습과 같은 것. 사야마이케 주변에는 1300여 그루의 벚나무가 심어져 있어 매년 봄이면 그야말로 눈부신 풍광을 그려내고 있다.

사야마이케를 보존하고 활용하고 있는 일본인들의 모습을 통해 한반도를 대표하는 수리시설인 벽골제를 대하는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게 된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두 유적에 남아있는 토목기술은 너무도 동일한데, 이에 대한 조사와 연구는 한발늦게 이뤄지고 있는 현실은 안타깝기만하다. 더 늦기전에 이 거대한 역사적, 문화적 자산을 어떠한 형태로 후대에 물려주어야만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필요해 보인다.

일본 오사카 = 김미진 기자

◆자문위원 최완규((재)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원광대 교수)

성정용(충북대 교수·한국상고사학회 회장)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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