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부성, 역사유적은 최고 자산이다
전주부성, 역사유적은 최고 자산이다
  • 한성천 기자
  • 승인 2016.09.1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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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부성 名品만들기-8. 전략①

 전주(全州)는 후백제 견훤왕(甄萱, 867~936) 시절 도읍지였다. 조선시대에는 조선(朝鮮)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李成桂, 1335~1408)의 본향이었다. 후백제와 조선, 두 시대를 풍미했던 전주는 왕도(王都)로서 위용을 떨쳤던 도시다. 그러나 지금은 일부 흔적만이 남아있다. 대신 가장 한국적인 전통문화를 여느 도시보다 잘 보존하고 계승해 오늘날 ‘대한민국 문화특별시’로서의 위상을 전 세계에 떨치고 있다. 연간 전주 한옥마을을 찾는 관광객 수는 1000만 명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밀려드는 관광객들로 인해 전주 한옥마을은 한계점을 넘어섰다. 어떤 방법으로든 넘쳐나는 관광객들을 수용할 수 있는 관광 인프라 구축과 전통문화와 현대문화를 접목한 인프라 및 콘텐츠 개발이 시급하다.  

이에 본보는 그간 세계적인 관광도시로 인정받고 있는 몇몇 도시들의 사례를 소개한 데 이어 앞으로 각계 전문가들의 의견과 20여 년에 걸쳐 관광진흥책을 현장에서 취재하고 연구해온 기자의 다양한 경험을 살려 전주시를 명품도시도 만들기 위한 전략을 4회에 걸쳐 소개해 나갈 계획이다. 

#1. 역사경관 재구성하자 

한양도성 총괄 건축가인 승효상 씨는 ‘역사유적이 도시가 간직한 최고의 자산이다’고 강조했다. 다시 말하자면 관광도시는 역사경관을 간직해야 지속 가능하다는 말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전주시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역사경관 외연확대’가 된다. 전주의 역사경관 재구성을 서둘러야 한다는 소리와도 같다. ‘관광자원론’의 시작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경기전(사적 제339호)·어진박물관·전주향교(사적 제379호)와 한옥마을을 중심으로 한 전주의 ‘역사지구’와 구시가의 중심지인 전라감영지와 연결하려면 ▲전라감영의 상징복원은 절대적이다. 또한, 서신·효자·평화·삼천·인후 지역 등 신시가 개발에 의해 상대적으로 쇠락해버린 다가·고사동 일대 구시가 도심재생을 위해선 ▲‘서문(西門) 복원’도 필수 과제 중 하나다. 또 ▲풍남문~전라감영 간 ‘전통테마거리’와 ▲완산교~전라감영 간 ‘약전거리/서화거리’, ▲한국전통문화전당 주변 ‘전주 음식거리’ 등을 복원 및 재조성해 관광객들에게 조선시대로의 시간여행과 함께 한국 최고인 전주 맛의 즐거움도 선사해야 한다. 이와 함께 왕도(王都)로서의 위용을 되살리기 위한 이른바 ▲‘전주부성 성벽 흔적잇기’도 함께 추진해야 한다.

 여기에 기린봉 중턱 동고산성에 있는 ▲후백제 ‘견훤궁터’의 복원도 적극 검토해야 한다. 후백제 견훤왕시절 도읍지였던 전주의 역사재창조를 통해 새로운 역사콘텐츠를 개발하고 한옥마을과 전주부성을 연계한 관광자원개발이 필요하다. 중장기 과제로 ▲한벽루·자연박물관에서 기린봉 중바위까지 케이블카 건설과 ▲중바위 위쪽에 한옥마을과 전주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전주견훤전망대(가칭)’ 건설도 적극 검토대상이다.

이처럼 상징복원을 통한 전주의 역사경관 복원 및 재구성은 ‘1000만 전주관광시대’를 열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다.

#2. 동·서양 관광도시서 배우자

 체코 프라하(Praha)가 ‘역사지구-구시가-신시가’로 도시공간을 연결해 연간 1억 명의 관광객을 유인하고 있는 도시공간구성 전략은 전주가 벤치마킹할 부분이다. 그리고 중세 고딕지구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음악과 미술, 음식을 접목시켜 관광객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고 도시 전체가 세계적인 건축가 가우디 박물관으로 평가받고 있는 스페인 까딸루나주 바르셀로나(Barcelona),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융단폭격으로 모든 게 파괴된 독일 드레스덴(Dresden)이 역사복원을 통해 오늘날 ‘유럽의 발코니’로 평가받고 있는 점 모두 역사경관을 가장 큰 자산으로 적극 활용해 오늘날 지구촌가족을 흥분시키고 있다. 연중 발길을 끌어당기고 있다.

 아시아 지역에서 마찬가지다. 중국 쓰촨성(四川省) 청두시(成都市)가 사면이 고층아파트로 둘러싸여 있는 ‘관작거리’를 그대로 보존, 연중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황산시(?山市)도 ‘청대거리’를 보존해 청나라시대로 시간여행을 제공해 관광객들에게 황산만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일본 이시카와현(石川縣) 가나자와시(金澤市) 역시 태평양전쟁의 폭격 피해를 입지 않아 에도시대의 전통적 목조 건축물을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는 ‘히가시차야 거리’와 일본 3대 정원인 겐로쿠엔(兼六園)을 통해 과거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 동·서양 도시들의 공통점은 역사경관을 보존, 복원해 지역주민들에게는 최고의 문화자긍심을 갖게 하는 한편 관광객들에게는 과거로의 시간여행 즐거움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이다. 

#3. 천년 전주역사 재창조하자 

 일제강점기시대(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1945년 8월 15일 약 35년) 일제(日帝)는 ‘조선왕도 말살정책’ 일환으로 전주정신(全州情神)의 중심이었던 전주부성의 4대문 중 현존하는 풍남문(보물 제308호)만 남긴 채 동문·서문·북문과 성벽을 모두 헐어버렸다. 전주 객사(보물 제583호)는 고려·조선 시대에 고을에 설치했던 객관으로 출장나온 관원이나 외국사신의 숙소로도 사용하다 조선시대에 와서 주전(본관)에 전패(殿牌, 왕을 상징하는 일종의 위패(位牌))를 안치하고 왕에게 배례를 올렸던 역사유적이다. 국가 경조시에는 민관이 합동으로 객사에서 의식을 거행하거나 외객을 접대할 때는 연회장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일제는 국왕에게 배례하던 객사 우측 칸도 도로를 낸다면 명분을 내세워 헐었다. 그리고 객사를 산업전시장으로 활용하는 등 그 위상을 의도적으로 격하시켰다. 당시 일제는 ‘조선왕조 본향’인 전주를 훼손하는데 엄청난 공을 들였다.

전라감영 철거는 물론 1380년(고려 우왕 6년) 남원의 황산대첩에서 왜구를 물리치고 돌아가던 이성계 장군이 전주로 올라와 승전축하연을 벌인 ‘오목대(梧木臺, 전북기념물 제16호)’와 이성계의 5대 할아버지인 목조(穆祖) 이안사(李安社)의 출생지인 ‘이목대(梨木臺)’를 분리시키기 위해 철도를 낸다는 이유로 또 산줄기를 잘랐다. 풍수상으로 전주부성의 좌청룡(左靑龍) 격인 ‘용머리고개’도 잘랐다. 그리고 전주에서 풍수상 배산임수(背山臨水) 최고의 명당자리로 손꼽혔던 다가산(多佳山)과 지금의 전주기전대학에 일본 신사참배지를 조성하고 전주인들로 하여금 일왕(日王)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이른바 조선정신 말살정책이 최고조에 달했던 것이다. 

 일제 폭압의 정도가 강해지자 이에 반발한 전주인들은 전주부성을 버리고 성 밖인 풍남동과 교동 일대에 집을 짓고 이주해 일본사람들과 생활을 거부했다. 지금의 전주 한옥마을이 태동하게 된 이유다.

전주 객사 현판에 새겨져 있는 ‘풍패지관(豊沛之館)’이 알려주듯 전주는 조선왕조의 발원지다. 따라서 전주인(全州人)은 왕도인(王都人)으로서 대한민국 최고의 문화자긍심을 가져야 한다.

글=한성천 기자
사진=김 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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