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어른들을 기다리며
다시, 어른들을 기다리며
  • 이해숙
  • 승인 2016.09.18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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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래도 교육위원회에 속해있고, 교육문제를 담당하다 보니 주변에서 요즘 청소년들에 대한 우려와 걱정의 소리들을 부쩍 많이 듣게 된다.

 참을성이 없다느니, 자기밖에 모른다느니, 어른을 인정할 줄 모른다느니, 예의가 없다느니, 점점 잔인해진다는 등의 ‘싸가지 없는 아이들’에 대한 성토의 소리들이 대부분이다.

 공감을 못하는 게 아님에도, 있는 그대로 듣기에는 야박스럽게 느껴지는 부분이 많다. 무엇이 이 아이들을 ‘싸가지 없는 아이들’로 변하게 했을까에 대한 문제에 대해선 아무런 답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켜보는 이 ‘싸가지 없는 아이들’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아이들이라는 걸 우린 알고나 있는 걸까?

 OECD국가 중 어린이와 청소년들의 행복지구가 꼴찌인 나라, OECD국가 중 청소년들의 공부시간 1위인 나라, 어린이 청소년들의 사망 중 자살이 차지하는 비율 1위의 나라, 더 고통스러운 건 그러한 자살 증가율이 세계 2위라는 것이며, 그 이유 중 가장 큰 건 성적과 진학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는 걸 어른들은 알고나 있을까?

 “희망이 없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 “나는 고립되었다”

 그들이 쓰러져가면서 했던 말들이다.

 부모들, 교사들, 학원의 강사들, 이웃의 어른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시선을 맞추고 그들의 말과 행동을 이해하려 하고 감싸 줄 어른들은 좀처럼 찾기 어렵다.

 그들도 그들과 그들이 관계한 굴레를 지탱하기도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른들이 그들의 온기를 자신들의 내부세계로만 돌리기 시작하면서, 외부로 향하던 대부분의 온기들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그 온기들은 아이들의 어지간한 실수들을 눈감아 수 있는 따스함이었고, 참고 기다려줄 줄 아는 따스함이었고, 지금의 태도보다 가능성을 엿볼 수 있는 따스함이었고, 기꺼이 자신의 한쪽 자리를 내어줄 줄 아는 따스함이었고, 그들의 등을 내밀어 쉴 수 있게 하는 따스함이었으며 그 따스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살만한 세상’을 기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의 따스함이 식어가면서 아이들에겐 이해와 관용의 자리에 ‘채찍과 서열과 효율’만이 채워지고 있다.

 과일 하나를 따 먹어도 밭 뙈기 전체를 물려야 시원하고, 아이들끼리의 다툼도 법으로 다스려야 시원하고, 내 아이의 잘못은 무조건 덮어져야 시원하고, 남 아이의 잘못은 세상 모두에게 드러나 어느 곳에도 발붙일 수 없어야 시원하고, 내 아이의 성적에 방해받을까 봐 조금만 시끄러워도 문제아로 낙인찍고, 그것도 모자라 기어이 격리시켜 그들끼리 모아놓고 범죄의 그늘에 가려도 신경 쓰지 않는 어른들.

 그 어른들의 넘치는 보호와 관심 속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서 세상을 향한 배려와 관용을 기대할 수는 있는 것일까?

 지금 우리 사회는 차갑고 냉정한 이성의 도구, 법이라는 잣대를 통해 뜨겁고 생동감 있는 감성의 인간을 재단하고 있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힘 있고 가진 사람들’ 에게선 무기로 이용되고, ‘힘없고 가지지 못한 사람들’ 에겐 ‘수갑’으로 이용되고 마는 ‘늘고 주는 잣대’가 펄펄 뛰는 아이들에게도 가감 없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지금 흔들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필요하다.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 맞을 줄 아는 어른, 이해하려 하기 보다 그저 지켜봐 주는 어른, 채근하기보다 끝내 기다려 줄 줄 아는 어른, 말썽꾸러기 제제를 따스한 시선으로 한결같이 지켜봐 주던 뽀르뚜 아저씨 같은 어른 말이다.

 다시 나타날, 그런 어른들이 몹시도 기다려진다.

 이해숙<전북도의회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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