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멤버 크로마이트
리멤버 크로마이트
  • 최동철
  • 승인 2016.09.11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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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만적인 공포와 장엄함, 밤이 되자 눈앞의 광경은 정녕 단테가 그린 지옥이었다.”  

 암호명 ‘크로마이트’라 불린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된 1950년 9월 15일, 당시 맥아더 장군을 동행한 종군기자들이 묘사한 말이다. 그날 새벽 제1해병대사단 5연대 1대대 1중대 소대장인 발도메르 로페즈 중위는 상륙부대 선두에 서서 인천해안 절벽을 넘어섰다. 그 순간 북한군 벙커에서 기관총이 불을 뿜었고 로페즈 중위는 수류탄을 던지려다 가슴과 어깨에 총을 맞고 수류탄을 떨어트렸다. 뒤따르는 소대원들을 구하고자 본능적으로 수류탄을 가슴으로 덮고 장렬히 산화했다. 자극을 받은 소대원들은 일제히 돌격해 기관총 진지를 제압하고 북한군을 섬멸했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종군기자들은 ”인간을 위대하게 만든 용기있는 ‘죽음’이라는 기사를 세계 곳곳에 급히 타전했다. 미국은 인천상륙작전 최초 희생자 로페즈 중위에게 최고 무공훈장인 명예훈장을 수여했다. 

  이렇게 시작된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 자신도 “5천분의 1의 세기의 도박, 누구도 이런 시도를 할 만큼 무모하지 않을 것이다.”고 말한 것처럼 성공확률이 극히 적은 위험한 작전이었다. 기뢰가 많이 매설돼 있고, 밀물과 썰물의 극심한 수심 차이, 협소한 수로와 진입로 등 제약사항이 많아 상륙작전을 수행하기에는 상당히 부적합했다. 전쟁 역사상 시도된 500여 번의 상륙작전 중에서 노르망디와 인천을 성공한 작전으로 꼽는데 인천은 노르망디보다 더 어려운 여건에서 이뤄졌다고 한다. 

  올해로 66주년이 되는 인천상륙작전은 한반도 역사와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꾼 획기적인 작전이었다. 서울 탈환으로 북한군의 병참선이 차단돼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주력부대를 포위하여 붕괴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국군과 유엔군의 인적·물적·시간적 손실을 최소화했다. 불과 10일 만에 서울을 탈환해 전체 전쟁일수를 3분의 1로 단축했고, 아군 병력 14만 명과 국민 200여만 명의 피해를 줄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역사에 가정법은 없지만, 만약 이 작전이 감행되지 않았다면, 실패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일지 자못 궁금하다. 당시 낙동강 방어선이 제주도까지 밀린 백척간두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면 지금의 자유와 풍요를 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 작전으로 유엔참전국 전사자는 로페즈 중위를 포함 1,500여 명에 이른다. 전혀 알지 못하는 나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우리를 위해 유명을 달리한 그들에게 깊은 경의를 표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인천상륙작전은 완성도가 미흡하고, 철 지난 반공영화 ‘국뽕’이라는 일부 혹평이 있었음에도 관객 700만을 훌쩍 넘어섰다. 논란을 떠나 초개와 같이 몸을 던져 자신을 희생하는 무명용사들 모습에 감동하고, 실화에 기반을 둔 켈로부대 등의 사활을 건 임무수행이 볼만했기 때문이리라. 

  6·25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참전용사는 국군 13만 7,889명과 유엔군 4만 670명 등 17만 8,559명에 이른다. 66년전 잿더미 나라에서 오늘날 세계 유수의 나라로 발전한 것은 국민의 각고한 노력과 함께 참전용사들의 피로 지켜낸 자유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지난날 목숨을 강요당하던 시절에 살지 않은 행운을 얻은 우리들. 지금 누리고 있는 자유와 풍요는 남은 자들의 자유와 풍요를 위해 피 흘린 참전용사들의 덕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피어날 수 없는 자유요, 맛볼 수 없는 풍요이다. 풍전등화 위기에 놓인 대한민국을 지켜낸 그들의 숭고한 희생을 오래오래 기억하고 최상의 존경과 예우를 드린다.

 
최동철 전북동부보훈지청 보상과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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