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공서의 화분에서
관공서의 화분에서
  • 이동희
  • 승인 2016.08.31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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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어느 주민 센터를 들렸다. ‘동사무소’가 어느새 ‘주민센터’로 그 이름이 바뀐 지도 꽤 되었다. 이름에 걸맞게 내용도, 그곳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의식도 변했는지 궁금하다. 그러던 차 며칠 전에 어느 ‘주민센터’에 볼 일이 생겨 들렸다. 번호표를 뽑고 순번을 기다리느라 사무실을 둘러보니 난화분이 창틀에 보기 좋게 놓여 있었다. 언제 누군가가 ‘선물’했음을 알리기라도 한다는 듯이 난화분이 황금색 포장지에 묶인 그대로였다.

 그런데 난화분이 생기를 잃은 듯이 보였다. 아무리 물을 가까이하기를 꺼려서 ‘게을러야 난을 잘 기른다’는 속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전혀 물을 주지 않는 난화분이 살아남을 리는 없을 것이다. 하지 않아도 좋을 걱정인지는 몰라도, 그런 염려를 지우지 못한 채 센터의 후문 쪽 창밖을 보니, 그렇게 황금색 포장지가 묶여 있는 채 말라죽은 난화분이 몇 개 버려진 그래도 놓여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어느 가게를 봐도 사정은 비슷하다. ‘신장개업’에 맞춰 크고 작은 축하 화분들이 가게의 실내외를 장식한다. 그 화분들이 봄부터 가을까지는 그래도 괜찮다. 겨울이 돼도 열대성 활엽수들은 그 자리 그대로 놓여 있다. 가게 사장님께서 돈 버는데 바빠서 그랬는지, 아니면 일회성 장식물로 여겨서 그랬는지, 그도 아니면 하찮은 식물이라서 그랬는지, 제때에 물을 주고, 추위를 막아주는 손길이 없어서 그 값비싼 관상수들은 하염없이 말라가고, 대책 없이 얼어 죽어갈 뿐이었다. 마치 내 수족이 그렇게 박대를 당하고 버려지는 것처럼 안타까웠다.

 각 급 학교도 사정은 비슷하다. 어느 사려 깊은 학교에서는 방학 때면 각 교실에 있는 화분들을 한 곳에 모아서 집단 관리하기도 하지만, 대부분 학년 초에 환경정리를 위해서 비치한 화분들이 물주기와 햇볕 쬐기를 제때에 하지 못해서 한 학기를 다하지 못하고 그 생명을 다하는 화분이 부지기수다.

 그깟, 화분쯤이야 이파리 좋을 때, 꽃이 한창일 때 한 번 보고 즐기면 그만 아닌가? 그렇게 한번 쓰고 버려져 마구 소비되어야 꽃집도 경기가 좋아지고 경제가 돌아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인심 후하게 생각하면 그만이라며 주변에서 지청구를 듣기도 한다.

 그래도 그렇다. 화분에 담긴 식물도 생명체다. 모든 생명체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불가의 세계관을 빌리지 않더라도, ‘네가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네가 있는 것’은 영원불변의 진리다. 생태적 연쇄성과 상호의존성은 생명이 살아가는 원리요 진리다. 인간 스스로 우주의 관장자요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면서, 하는 짓은 우주의 하수인이요 영혼 없는 존재처럼 행동해도 괜찮은 것인가? 더구나 관공서, 가게, 학교 등 ‘보다 나은 삶’을 불변의 가치로 지향하는 곳에서 그래도 괜찮은 것인가 의아하기만 하다.

 사람만을 존귀하게 여기면 그 사람마저도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 있다. 나도 언젠가는 저 화분에 담긴 한 그루 나무이거나, 한 포기의 풀로 변할 날도 그리 멀지 않다는 생각으로, 식물 한 포기라도 상호의존적인 사랑의 손길로 보살필 수는 없을까?

 생태적 순환의 원리를 의미 있는 아름다움으로 노래한 시를 본다. <풀섶에서 쇳조각을 주워들자/ 주위 덩굴이 뿌리째 뽑혀 나왔다/ 이 쇳조각/ 내년쯤엔 꽃망울을 피우고 바람에 하느작거렸을 텐가/ 산길에 졸며 서 있는 전봇대/ 반은 나무가 되었다/ 두드려보면 오래 스민 수액이 찰랑거린다/ 딸에 머리에 들꽃을 꽂아주고도 모자라/ 토끼풀로 팔찌 발찌를 엮었다/ 사람이 꽃으로 피는 건 백년도 안 걸린다/ 산자락을 넘어선 바람이/ 비릿한 냄새를 풍기며 물속을 헤엄친다/ 겨우 한나절 동안 이 별에서 생긴 일이다>-(윤의섭「블랙홀」전문)

 지금까지 인생을 가장 짧게 표현하는 말로 ‘인생행락백년(人生行樂百年)’만한 것이 없는 것으로 알았다. 그러나 쇳조각이 풀꽃이 되고, 시멘트덩어리 전봇대가 나무가 되며,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 딸이 들꽃-토끼풀이 되는데 겨우 한나절뿐이 안 걸린다는 데는 한참 미치지 못한다. 길고 오랜 것만이 가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짧아도 생명은 소중하고 더욱 아름다워야 하며, 길어도 결국은 우주의 한 귀퉁이를 지키며 사는 일만큼 보람 있는 것이 또 무엇이겠느냐는 것이다. 사물을 생태적 연관성과 상호의존성으로 감별하는 정신력이 블랙홀에서 튀어나온 초신성(超新星)처럼 밝고 환하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한 행성-지구의 나그네일 뿐이다. 화분에 담긴 한 그루 생명을 소홀히 하면서 우주의 관장자요, 만물의 영장이라는 자만은 언감생심일 뿐이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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