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제 벽골제 과거와 현재 - 조사성과와 보존상황
김제 벽골제 과거와 현재 - 조사성과와 보존상황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6.08.30 1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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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고대 문명의 세계유산이다<2>

▲ 2016년 발굴조사 과정에서 촬영된 중심거 세부 모습(전북문화재연구원 제공)
 김제 벽골제(사적 제 111호)는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저수지로서 김제뿐 아니라 한반도의 농경문화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익히 잘 알려져 있다. 제방을 처음 쌓아올린 초축 시기와 벽골제가 담수를 하는 저수지였는지 해수 유입을 막는 기능을 했던 것인지에 대해 학계에서 의견이 일부 나뉘기도 하지만, 농경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되는 관개시설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이견은 없다. 마한에서부터 백제, 통일신라, 고려, 조선, 근대, 현재에 이르기까지 벽골제 주변에서 삶의 터전을 가꿔가고 있는 사람들이 농사를 짓고 있는 모습이 이를 뒷받침한다. 하지만 여기까지다. 학계를 제외하고는 벽골제를 더 깊게 들여다보지 않고 있는 현실인 것. 일제강점기에 무참하게 파괴되고, 6.25를 거치면서 더욱 처참하게 훼손되어간 벽골제의 아픈 역사를 보듬기 위해서라도 이 유적을 살갑게 바라봐야 할 때가 지금이다. 고대 농경문화의 보고이자 산실인 벽골제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그동안의 발굴성과와 보존상황을 점검한다. <편집자주> 

 1975년 충남대학교가 벽골제에 현존하고 있는 수문인 장생거(長生渠)와 경장거(經藏渠)의 발굴조사를 시행한 이후, 37년이 지나서야 벽골제에 대한 후속 발굴조사가 시작됐다. 지난 시간, 관계당국의 무관심으로 인해 대한민국을 대표할 수 있는 고대 수리유적은 깊게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전라북도와 김제시는 그렇게 뒤늦게 벽골제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지난 2012년부터 전북문화재연구원이 6차에 걸쳐 중심거와 용골마을 주변에 대한 조사를 마쳤고, 올해도 역시 연계 발굴조사가 진행 중인 상황으로, 해마다 관련 조사 결과에 대한 학계의 관심은 비상하다.

▲ 지난 2015년 보축제방을 정밀 조사한 결과 기저부층에서 다량의 초낭을 발견돼 현재 임시보호시설을 설치해 둔 상태다. (김미진 기자)
 그동안 3차 발굴조사 과정에서 얻은 연대 측정 결과로는 벽골제의 축조 시기가 모두 4세기로 나타났다. 이 연대는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 기록과도 거의 정확하게 들어맞는 내용으로 의미있는 결과다. 벽골제가 국내 존재하고 있는 여러 고대 수리시설의 맏형임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는 셈이다.

 이와 관련해 지난 2015년에는 김제 벽골제에서 온전한 형태의 초낭(草囊, 풀로 엮어 진흙을 담은 주머니)이 확인돼 이목을 끌기도 했다.

 제방 동쪽 부분 보축 제방(補築 堤防, 제방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주변에 설치한 보강 시설) 기저부에 쌓아 올린 것으로 확인된 초낭은 연약한 지반을 견고하게 만들어 제방을 더욱 튼튼하게 만들었다. 이 초낭에 대한 방사성탄소연대 측정 결과 7세기 전후의 통일신라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됐는데, 이 또한 통일신라 시대 원성왕 6년(790)에 전주 등 7개 주(州) 사람들에게 제방을 증·수축을 하게 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일치하는 것으로 의미가 크다.

 올 들어 3월에는 벽골제의 수문 중심거(中心渠)가 그 실체를 드러내면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도 했다.

 벽골제 제방의 중앙부에 위치한 중심거는 현존하는 2개의 수문인 장생거, 경장거와 같은 구조로 나타났고, 그 잔존 규모는 길이 1,770㎝, 너비 1,480㎝인 것으로 확인됐다. 중심거의 양쪽에는 돌기둥(石柱)을 세웠는데, 현재는 돌기둥의 상단부는 훼손되고 너비 83㎝, 두께 70㎝ 크기의 하단부만 남아 있는 상태로 조사됐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벽골제에는 장생거, 중심거, 경장거, 수여거, 유통거 등 총 5개의 수문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발굴 조사를 통해 오래된 벽골제에 대한 기록, 그 실체에 한 발짝 다가서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진진한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 중심거에서 확인된 수문의 형태는 중국 상해 오송강(吳松江) 하구부에 위치한 지단원 원대수갑유적(志丹苑元代水閘遺跡)과 유사한 특징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 학계의 시각이다. 더불어 제방 성토공법 기술인 부엽공법(敷葉工法, 나뭇가지, 잎사귀 등을 깔고 흙을 쌓는 방식)은 벽골제보다 후대에 축조된 일본 사야마이케(狹山池)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이는 수리유적과 관련해 중국에서 한국으로, 또 한국에서 일본으로 전해졌다는 기술계보가 성립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으로 볼 수 있다. 벽골제를 쌓아올린 공법과 수문 축조기법은 한·중·일 수리시설 간의 비교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로, 중국과 일본을 관통하는 특별한 사적이라는 점은 여러 번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처럼 벽골제는 현재까지 발굴조사를 통해 중심거 수문구조와 제방 성토방식과 부엽공법을 확인했고, 파손된 제방의 주변부 규모를 파악했다. 또 보축제방을 정밀 조사해 기저부층에서 다량의 초낭을 발견하고 임시보호시설을 설치해 두었다. 현재는 직선제방과 보축제방이 연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곡선수로 시점일대에 대한 발굴 조사를 진행 중으로, 조만간 발굴조사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뒤늦게 시작됐지만 해를 거듭할수록 벽골제의 역사적·문화적 의미와 복원의 당위성에 힘을 실어주는 발굴조사 결과가 발표되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완규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는 “벽골제는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저수지라는 외형적인 유적 가치도 중요하지만, 농경문화를 근간으로 삶을 영위해 온 우리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다”면서 “때문에 벽골제의 정확한 성격 규명을 통한 복원은 국민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김미진 기자

 

 ◆자문위원 최완규((재)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원광대 교수)

  성정용(충북대 교수·한국상고사학회 회장)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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