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독일 드레스덴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독일 드레스덴
  • 한성천 기자
  • 승인 2016.08.29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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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부성 名品만들기-7

 독일 드레스덴(Dresden)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역사적인 도시다.

 무엇을 창조했다는 말인가? 시민자긍심으로 드레스덴의 역사를 재창조한 것이다. 드레스덴은 여느 도시와 달랐다. 행정이, 학자가 앞장선 것이 아니다. 일반 시민들이 폭격으로 교회와 궁전이 붕괴된 것을 안타까워 흩어진 석재와 석상들을 집에 가져와 번호를 매겨 보관했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노이마르크트(Neumarkt) 광장 주변 제자리에 복원이 이뤄지자 각자 내놓았다. 지금의 레지덴츠 궁전(Residenz Schloss)과 츠빙거 궁전(Zwinger Palace), 프라우엔 교회(Frauenkirche), 국립오페라극장 젬퍼오퍼(Semper Opera House) 등을 복원해내는 대역사창조를 이뤄냈다. 지금도 드레스덴 각 유적을 보면 벽체 색깔이 각기 다르다. 2차 세계대전 이전에 ‘엘베강의 피렌체’ ‘독일의 피렌체’로 불렸던 드레스덴은 오늘날 복원을 통해 ‘유럽의 테라스’(괴테가 드레스덴에 처음으로 붙인 표현)로 재탄생했다. 복원을 통해 역사를 재창조해낸 대표적인 도시가 됐다. 더불어 상업도시로서의 면모도 갖춰 역사와 현대를 복합시켜 사람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전주는 어떠한가. 전주부성(全州府城)은 한양도성과 개성 다음으로 규모 면에서 조선시대 3대 성이었건만 침략 일본(日本)의 칼바람에 일부만 남기고 사라졌다. 이제 역사유적 복원을 통해 전주의 1000년 역사를 재창조할 때다. 

 

 #1. 엘베강의 피렌체, 드레스덴

 ‘유럽의 테라스’ ‘엘베강의 피렌체’로 불리고 있는 독일 드레스덴. 엘베강(江)을 끼고 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엘베강을 가운데 두고 좌안(左岸)의 구시가(舊市街)와 우안(右岸)의 신시가(新市街)로 나뉜다. 구시가와 신시가는 엘베강과 함께 잘 어울려 아름다운 도시를 연출하고 있다.

 노이마르크트 광장을 중심으로 건축의 꽃이 피어 있다. 1711년부터 1722년까지 11년에 걸쳐 건축된 츠빙거 궁전을 비롯해 왕성(王城), 국림오페라극장 젬퍼오퍼, 드레스덴미술관 등 고색창연한 건축물과 회화 등 많은 문화재가 많다. 여기에 드레스덴은 음악의 도시로도 명성을 떨치고 있다. 드레스덴교향악단을 비롯해 국민극장 등 음악예술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고, 오늘날까지 드레스덴 시민들은 향유하고 있다. 드레스덴은 역사유적과 음악 등 예술만이 있는 곳이 아니다. 통일 독일 전에는 동독이었다. 동독 도시 중에서 드레스덴은 남동부지역 경제와 교통·문화 중심지였다. 항공기 제조는 물론 정밀광학기기, 화학 등 공업이 활발했다.

 기자가 드레스덴을 방문한 날의 일기는 불규칙했다. 빗줄기가 후두두 흩날린다 싶더니 곧장 햇살이 엘베강을 비추곤 했다. 빗줄기와 햇살을 반복해 받고 있는 프라우엔 교회와 츠빙거 궁전, 엘베강의 모습은 시시각각 달랐다. 다양한 모습을 기자에게 보여주려는 듯했다.

 

 #2. 보석 같은 역사유적들

 드레스덴이 간직한 보석 같은 역사유적들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레지덴츠 궁전, 츠빙거 궁전, 국립오페라극장 젬퍼오퍼, 프라우엔 교회 등을 꼽을 수 있다.

 ‘레지던츠 궁전’은 독일 작센주(州) 드레스덴에 있는 가장 오래된 궁전이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대공습으로 파괴되었다. 옛 왕궁 마구간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아우구스투스 거리 옆의 ‘슈탈호프벽’만은 기적적으로 전화를 모면했다. 이곳에는 길이 101m, 높이 8m의 마이센 자기 타일로 만들어진 ‘군주들의 행진’이라는 벽화가 남아 있는데, 무려 2만5000여 개의 타일로 만들어졌다.

 ‘츠빙거 궁전’은 아우구스트 2세 통치기 예술과 문화를 반영하는 완벽한 미를 보여주고 있다. 마테우스 다니엘 푀펠만(1662~1736년)과 조각가 발타자르 페르모저의 작품이다. 원래는 엘베강을 향한 면을 개방한 ‘U’ 자형 안뜰로 만들었다. 그러나 1847년 공사를 이어받은 고트프리트 젬퍼(Semper Gottfried. 1803~1879년)는 1854년 지금의 츠빙거 궁전을 완성시켰다. 츠빙거 궁전의 가장 큰 특징은 ‘크로넨토어’(‘왕관의 문’이라는 뜻)와 ‘프랑스 파빌리온’이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완전히 파괴되었다. ‘국립오페라극장 젬퍼오퍼’는 드레스덴의 심장부에 위치한다. 고트프리트 젬퍼가 건축해 젬퍼의 이름이 붙여졌다. 젬퍼오퍼 역시 1869년 화재로 불타 재건됐지만 1945년 또다시 파괴되는 수모를 당했다. 

 

 #3. 2차 세계대전 때 모든 것 파괴돼

 드레스덴은 2차 세계대전 당시 모든 것을 잃었다. 1745년의 드레스덴 조약(프로이센, 작센, 오스트리아 간에 체결)으로 2차 슐레지엔 전쟁이 종결됐다. 그러나 7년에 걸친 슐레지엔 전쟁(1756~1763)으로 드레스덴의 3분의 2가 파괴됐다. 이때 드레스덴 요새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인류 역사상 가장 파괴적이고, 가장 많은 인명과 재산 피해를 남긴 제2차 세계대전 때 드레스덴은 모든 것이 파괴됐다. 1939년 9월 1일부터 새벽 4시 45분 아돌프 히틀러가 다스리는 나치 독일군이 폴란드의 서쪽 국경을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은 시작됐다. 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군이 1939년 9월 17일 폴란드의 동쪽 국경을 침공했고, 일본의 대한민국과 중국을 침략하는 등 전쟁의 화마는 전 세계를 휩쓸었다.

 2차 세계대전 끝말 나치군이 드레스덴에 집결해 있다는 정보가 연합군에 입수되자 1945년 2월 13일과 14일 영·미 연합군은 항공기 800대를 동원, 드레스덴 전역을 대대적으로 폭격했다. 대폭격은 4월 17일까지 계속되었다. 이 대폭격으로 3만5,000명에서 13 5,000명의 사망자를 내면서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중의 하나인 드레스덴의 상당 부분이 사라졌다. 너무 심하게 파괴되었기에 당시 복구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4. 시민들이 역사재창조 이뤄내

 연합군 대폭격으로 철저하게 파괴된 드레스덴. 복원에 대한 논의장에선 파괴 정도가 너무 심해 땅을 평평하게 다져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자는 제안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드레스덴 시민들은 반대했다. 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의 시민이란 자긍심이 높았던 드레스덴 시민들은 전쟁기간 폭격으로 파괴된 궁전과 교회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고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폭격으로 파괴돼 흩어진 석재와 석상들을 거둬들여 번호를 매겨 집에 보관했다. 그리고 복원 논의가 이뤄질 때 보관하던 석재와 석상 등을 내놓은 것이다.

 이런 시민들의 애정에 힘입어 성을 중심으로 주변에 유명한 바로크식 건물들을 재건했다. 프라우엔키르헤(1726~1743, 성모 마리아 교회)는 파괴 정도가 너무 심해 기념물로 보존하고 있다. 호프키르헤(1738~1755)와 크로이츠키르헤(1491, 1764~1792, 1900 복구, 성(聖)십자가교회), 1530~1535년에 건축되어 1889~1901년에 독일 르네상스 양식으로 복구된 옛 왕궁 역시 심하게 파손됐다.

 많은 박물관과 화랑들 중 유명한 츠빙거 박물관(1711~32)은 현재 복구되어 백랍제 기물과 도자기 같은 수많은 소장품과 동물학·광물학·수학·과학 등의 기기가 진열되어 있는 자료관들을 다시 공개하고 있다. 1960년 젬퍼 회화 화랑(1846)도 복원해 다시 문을 열었다. 사실 츠빙거 궁전뿐만 아니라 드레스덴의 모든 역사적 건축물은 전쟁 때 초토화되었다가 전후에 거의 완벽하게 복원한 몇 안 되는 도시 중의 하나다. 1945년부터 1963년까지 18년에 걸쳐 기초부터 철저한 복구공사가 진행됐다. 역사지 옆에는 현대식 쇼핑몰을 조성해 연중 문화체험과 쇼핑투어객들로 붐비고 있다.

 드레스덴은 복원에 앞장 선 시민들의 노력으로 오늘날 ‘유럽의 테라스’란 옛 명성을 되찾았다. 천년 역사를 간직한 ‘전주부성 명품만들기’를 추진중인 전주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글/사진=독일 드레스덴 한성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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