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수리시설의 과거와 현재
고대 수리시설의 과거와 현재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6.08.23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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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벽골제, 고대 문명의 세계유산이다 <1회>

김제 벽골제를 중심으로 펼쳐진 너른 평야는 살아 숨쉬는 농경박물관의 산실로 평가받으면서 김제시의 얼굴이 되고 있다. 현재까지의 발굴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진의 가운데를 가로 지르는 약 3km에 달하는 벽골제 제방을 기준로 윗쪽이 담수지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전북문화재연구원 제공)

 국가사적 제111호 김제 벽골제(碧骨堤)는 우리나라 농경문화의 상징이자 심장이다. 그 역사성과 가치 면에서 동서고금 인프라의 걸작으로, 최근 몇 년 사이에는 벽골제와 관련해 매우 중요한 고고학적 성과들이 발표되면서 더욱 주목받고 있다. 하지만, 관련 학계를 제외하고는 이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드문드문한 것이 현실이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지금까지 벽골제의 연구가 고고학이라는 전문분야에서 각자의 입론을 드러내는 부분적 조명에 그쳤다면, 거시적인 관점에서 학계는 물론 대중이 보다 넓게 벽골제를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인문학의 영역으로까지 연구의 장을 확대해야할 필요가 크다. 이에 따라 본보는 김제 벽골제와 성격이 유사한 해외 각국의 고대 치수사업과 관련된 유적을 살펴보는 특별 기획기사를 총 7차례에 걸쳐서 보도한다. 역사적으로나 고고학적, 국제 교류사적으로 돋보이는 김제 벽골제의 의의와 특징을 비교 조명해 김제 벽골제의 세계유산 지정을 향한 역사적 가치와 합리적인 보존·활용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편집자주> 

 자연이 인류에게 주는 최대의 축복인 물, 물 없이는 어떠한 생명체도 존재할 수 없음이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때로는 재앙이기도 했다. 전 세계 어딘가에는 걷잡을 수 없이 벌어지고 있는 물 부족 혹은 물 폭탄 등의 재앙으로 인해 심각한 고통에 빠진 인류도 존재한다.

 이처럼 물은 인간의 삶, 그 근본을 지배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에서 물을 어떻게 이용하는지, 곧 수자원을 어떻게 활용하는가는 인간의 생존을 좌우하는 문제가 되어왔다. 인간생활에 이로움을 주기 위한 수리시설은 농경이 시작된 이래 필수적인 장치였고, 이로 인한 관개체계의 발달은 곧 농경발달의 역사와 일맥상통한다고 봐야한다.

 이와 관련, 구석기와 신석기 시대에는 수렵채집을 통해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만큼 물의 관리에 대한 인류가 지녔던 욕망의 흔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청동기시대를 거쳐 고대, 중세로 이어지면서 인구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집단 간의 경쟁이 격화되기 시작하면서 물의 관리는 국가의 존폐를 가르는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게 된다. 당시에는 무엇보다 안정적인 식량 자원을 적기에 공급하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며, 자연스럽게 벼농사가 시작되고 수자원 관리의 중요성도 더더욱 커졌을 터다. 고고학적 자료에 의한 여러 가지 연구결과에 따르면 한반도에서 벼농사가 시작된 연대는 신석기 시대 말기 무렵부터인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고대사회에서 벼농사와 수리시설에 대한 중요성과 관심은 지대했던 것으로 보인다.

 삼국사기에는 서기 33년(백제 다루왕 6년)에 벼농사를 시작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을 비롯해 수해가 일어났을 때 논을 보수하라고 명령했던 내용, 제방을 수축하라고 했던 일, 백성에게 땅을 개간해 논을 만들고 벼를 심으라고 했던 일 등이 상세한 기록으로 남아있으니 말이다.

 

▲ 김제 벽골제와 관련해 1975년도 1차 발굴조사 이후 일부 복원된 장생거 수문의 전경이나, 복원의 내용이 사실과 거리가 있는 것으로 평가돼 아쉬움이 남아있는 상황이다. (전북문화재연구원 제공)

 그중에서도 전북 김제 벽골제는 치수사업을 통해 곡물을 안정적으로 생산하고 왕권과 국가를 유지하는 역사적 배경을 한반도에서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유적이라는 점에서 주목해야할 가치가 큰 유적이다.

 여러 고고학적 분석 자료를 종합해보면, 당시 벽골제를 이용한 농업 생산력은 매우 높았을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바탕으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정치적 집단이 성장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의 유통관련 시설이나 집단이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을 판단해볼 수 있다. 벽골제 인근 지역에서 발굴 조사된 유통의 거점인 부안 백산성(사적 제409호)과 백제 지방통치의 거점 정읍 고사부리성(사적 제494호)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다시 말해 벽골제의 농경 생산기반을 바탕으로 찬란했던 백제문화를 꽃피울 수 있었던 그 근본이요, 뿌리였던 셈이다.

 

▲ 김제 벽골제 수문 중 하나인 경장거의 측면 모습으로 석주의 원형이 비교적 덜 훼손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미진 기자)

 벽골제 축조,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수리시설로는 제천 의림지(義林池), 정읍 고부 눌제(訥堤), 밀양 수산제(守山堤), 영천 청제(菁堤) 등 대규모 저수지들이 있다. 이 또한 우리나라가 벼농사에 얼마나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온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가장 중요한 점은 벽골제의 축조는 백제의 중앙세력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 김제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던 마한세력에 의해 최초로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기술로 막대한 기계장비를 동원해 짓고 있는 댐들과 비교해서 전혀 뒤지지 않는 고대 수리시설의 가치. 그 중에서도 김제의 너른 평야에 터전을 잡고 살아간 이 땅의 선조들이 두 손으로 직접 일으켰다는 점은 꼭 기억해야할 역사이고, 꼭 자랑해야할 문화유산인 것이다.

 이 기념비적인 가치를 지닌 귀중한 농경문화유산이 지금도 살아 숨쉬고 있음에 주목해야한다.

 농경문화유산은 인구증가에 따른 식량 문제를 해결하는 불가피한 수단이자 경제적인 부를 축적하는 원천 가운데 하나였다. 이를 중심으로 사회가 구성됐고, 국가가 만들어졌다. 치수와 관개체계를 중심으로 벌어진 인류의 진화. 그것은 인간다운 삶을 향한 거대한 진보였던 셈이다.

 김미진 기자

 

 ◆자문위원 최완규((재)전북문화재연구원 이사장·원광대 교수)
  성정용(충북대 교수·한국상고사학회 회장)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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