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보내며
친구를 보내며
  • 김철승
  • 승인 2016.08.22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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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한 명을 하늘나라에 보냈다. 100세 시대에 너무나 빨리 떠난 친구 영정 앞에 친구들 모두 말을 잃었다.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의식을 잃고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휴가 중에 들어야 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함께 다닌 친구였고 자주 만나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이기에 더 충격은 컸다. 부고를 전해야 하나 무어라 써야 할지 몰라 오랜 시간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영정사진을 차마 바라볼 수 없다고 장례식장 주변을 서성이다 간 친구도 있었고 미망인과 아이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서둘러 자리를 피한 친구도 있었다. 이런 일을 자주 겼었을 인생의 선배들이 높아만 보이기까지 했다. 나이가 들면 해아래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다는 성경의 구절을 이해하고 인생의 허무함을 더 잘 알 수 있을까? 고사성어 백아절현(伯牙絶絃; 백아라는 거문고 연주자가 자기의 음악을 알아 준 종자기의 죽음을 슬퍼한 나머지 거문고 줄을 끊어 버렸다는 뜻으로 친구의 죽음을 슬퍼한다는 뜻)이 떠오르는 한 주간이었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나그네 인생이라 하지만 아쉬움에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간경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합병증이 발생했다고 한다. 좋은 약물도 있고 간이식도 생각할 수 있는 첨단 의학의 시대에, 이게 어찌된 일인지 누구도 답을 하지 못했다. 장례절차를 함께하는 동안 먹먹한 가슴과 머릿속의 풀리지 않는 의문들로 힘들어야 했다. 평소 딸바보의 대명사로 통한 친구였다. 친구들과 모이면 딸들의 잘된 일을 자랑스러워하고 진로가 안 풀린 일은 안타까워했었다. 가능하면 어떡해서는 가장 좋은 교육을 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하던 친구였다. 인생을 마감하는 그날 오전까지도 자신의 자리를 꿋꿋하게 지키며 근무하였다 하니 책임감을 높이 사야 할지 미련함을 답답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평소 삶과 죽음을 가까이 대하는 직업이기에 나름대로 철학과 신앙을 배경으로 한 나 자신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한 친구의 죽음 앞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삶과 죽음, 선과 악에 대한 집요한 의문을 제기한 세계적인 문호인 톨스토이는 친구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그의 작품인 “이반일리치의 죽음”을 통해 간접적으로 느껴볼 수 있겠다. 성공가도를 달리던 판사인 이반일리치가 원인모를 병에 의해 죽음으로 다가가는 동안 평범하게 지냈던 일상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게 된다. 부유층과 농부의 대비를 통해 자신의 죽음을 대하는 상반된 태도를 대하고 여러 과정을 거쳐 죽음, 즉 절대고독을 받아들이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의 사망소식을 전해 들은 사람들 반응의 다양성과 남의 눈을 통한 죽음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극복하는 과정도 보여준다. 한 인간의 죽음 앞에서 인간의 존재와 존재양식에 대해 본질적인 의문을 던진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진정한 삶의 의미를 깨닫고 죽음조차 넘어선다는 이반 일리치의 깨달음이 친구에게도 있었을까? 언젠가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대명제에 대한 어떤 해답을 얻었을까? 그간의 자신의 삶에 대해 어떤 의미부여를 했을까? 톨스토이의 심오한 메시지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먼저 떠난 친구가 그동안 혼자 감당했을 절대고독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하니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까울 뿐이다. 자기의 속마음을 알아주는 지기지우(知己之友; 거문고의 달인 백아의 거문고 소리를 듣고 친구 종자기가 백아의 감정과 곡의 의미를 정확히 알라 음악을 통해 우정을 쌓아갔다는 뜻)가 되 주지 못해 미안할 뿐이다. 친구가 최근에 가끔 불렀던 ‘친구’라는 노래도 그래서 그리 좋아했나 보다.

 무엇이 이 친구의 어깨를 그리 무겁게 한 것일까? 적극적인 현대의학의 치료를 마다하고 가장의 책임을 어찌 그리 쉽게 포기했는가? 만나면 그리 자랑하던 딸들의 이야기도 아직 다 못했을 텐데 벌써 끝낸단 말인가? 가족들을 가장 좋은 것들로 섬겼을 친구여, 세상의 일로 힘들었고 건강 문제로 고민이 많았을 터인데 이제 그 무거움이 없어졌으니 천국에서 편히 쉬게나. 가족에게도 친구에게도 말 못할 무엇인가를 이제는 내려놓고 편히 가게나. 인간 생명의 시작과 끝은 하늘에 있다 하니 하늘에서 그대의 또 다른 역할이 있지 않겠나? 한 줌 흙으로 다시 돌아갔지만 “죽음 대신 빛이 있었다”는 톨스토이의 말로 위로를 삼고 싶다. 유가족들에게도 하늘의 크신 위로가 함께하시길 빈다.

 김철승<의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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