휘몰아치는 광풍 속으로
휘몰아치는 광풍 속으로
  • 이문수
  • 승인 2016.07.31 1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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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달 한 번씩 칼럼을 쓰는 게 만만치 않다. 가난한 집에 제사 돌아오듯이 한 달이 쏜살같이 다가온다. 그러다 보니, 바쁘다는 핑계로 원고 마감일을 조심스럽게 미루기도 했다. 미룰 때마다 기꺼이 형편을 봐 주는 담당 기자가 고맙다. 무딘 펜 끝에 메마른 잉크로 쓰는 글이지만 기쁘게 공감해 주는 독자들과 미술 이야기를 같이 나누는 즐거움이 있기에 오늘도 마감 시간이 가까이 닥쳐와서야 책상에 앉았다. 오늘은 불꽃 같은 정열로 순간을 포착해서 감동을 준 사진가 얘기를 하겠다.

 아무리 느리게 걸어도 흐르는 땀을 추스르기 힘들었던 무더운 날, 전주한옥마을 중심에 터를 잡고 있는 교동아트미술관에 갔었다. 전시장을 들어서는 순간, 바람에 일렁이는 대나무 숲을 촬영해서 한지에 검정 잉크를 뿌리듯이 출력한 작품이 필자의 마음을 송두리째 앗았다. 회화성이 물씬 배어 나오는 맛이 좋았고, 댓잎에 스치는 바람 소리가 좋았다.

 필자를 황홀경에 빠지게 한 작품은 휘몰아치는 겨울 광풍 속에서 흔들리는 대나무 숲을 3분간 조리개를 열어서 촬영한 작품이다. 캔버스 위에 탄탄하게 젯소(Gesso)를 칠 한 후, 거친 붓에 묽은 물감을 듬뿍 찍어서 갈필(渴筆) 맛이 살아날 때까지 단숨에 휘갈겨 놓은 듯했다. 사진가는 고통과 좌절,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운 절정의 순간들을 흔들리는 대나무 숲에 투영한 것이다. <혼돈>이라는 제목을 달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진 듯한 그 순간은 이성도 감성도 없었다. 다만 소유하기 위해 미친 듯이 쫓아가기만 했었다”고 말했다.

 사진가 한종일은 미소를 머금고 허허롭게 웃는 모습이 참 좋다. 영락 마음씨 좋은 이웃 아저씨다. 그는 행정공무원으로 17년간 재직했었다. 눈을 가린 경주마처럼 옆과 뒤를 돌아보지 않고 일에만 매진했단다. 동료로부터 부러움과 시기를 한몸에 받고 있던 어느 날, 아침에 눈을 떴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았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전신마비라는 불청객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어처구니없지만, 사진가의 병은 지금까지의 현대 의학으로는 원인을 알 수 없다. 담당 의사의 말에 따르면, ‘우주에 떠도는 수많은 나쁜 기운 중의 하나가 몸속에 들어와서 척수에 빈 구멍을 낸 것이라고.’ 그 후로 수년간 병원 신세를 지고, 휠체어에 몸을 의지해야만 했다. 2002년, 월드컵의 열기가 후끈할 때 그는 1급 지체 장애인이 되었다.

 궁여지책으로 모악산 자락에 생청국장집을 차려 놓고, 허구한 날 등산객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다시 걷고 싶다’는 소박하고 절박한 꿈을 꾸었다. 따사로운 햇살이 가득한 어느 날, 손에 잡힌 기둥을 부여잡고 몸을 일으켜 세웠다.

 지금은 기적처럼 한 달에 일주일 정도는 조심스럽게 걸을 수 있다. 하지만, 의사는 ‘걸으면 위험하다’고 말린다. 사진가는 겨우 걸을 수 있는 일주일 동안 격한 통증을 삭히면서 출사(出寫)한다. 그의 가슴에서 용솟음치는 욕망과 열정을 토해 낼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혼신을 다해서 출사한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삼 주 정도는 쉬어야만 한다. 그래서 그는 일주일에 한 달 분량의 삶을 압축해서 살고 있다.

 예술은 결국 작가의 내면과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을 들여다보는 데 있다. 인간이 가진 다양한 면면의 이야기를 들추면서 그 안에서 자신들을 낯설게 재발견하는 것이다. 필자는 겨울 광풍에 끌려 시쳇말로 ‘지름신’이 내렸다. 올해 안에 값을 치르기로 약속하고 그 작품을 샀다. (외상이면 소도 잡는다고 했던가) 갖고 싶은 장난감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처럼 가슴이 두근거렸다. 거실 한가운데 걸려 있던 필자의 그림을 떼고, 그 자리에 걸었다. 요즈음에는 아침저녁으로 안복을 누린다. 볼 때마다 벅찬 감동이 살아나고 마음이 편안해진다.

 필자는 여름의 한가운데에서 만난 겨울 광풍을 보면서 겨울을 기다리고 있다. 올겨울 거친 삭풍이 부는 날에는 대나무 숲에 갈 것이다. 휘몰아치는 광풍 속에서 옷깃을 여미고 댓잎에 부딪치는 바람 소리를 즐기고 싶기 때문이다.

 이문수<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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