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석(痛惜)의 염(念)
통석(痛惜)의 염(念)
  • 나영주
  • 승인 2016.07.31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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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사재판에서 종종 보는 광경이 있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판사의 질문에 연신 잘못했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피고인의 모습이다. 진정으로 반성해서 그런 것인지, 혹은 자신의 죄를 덜기 위해서인지는 몰라도 사죄와 반성의 모습을 보인다. 대부분 무난한 반성의 말을 하지만, 가끔 사죄인지 변명인지 모를 말로 혼이 나기도 한다.

 사과가 횡행하는 시절이다. 형사재판을 받는 필부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고위공직자와 기업의 경영인과 같이 이른바 사회지도층 인사들의 사과들이다. 그들 또한 연신 머리를 조아리지만, 사과를 받는 국민들의 입맛은 개운치 않다. 사과 자체가 변명으로 들리기 때문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사과문을 올바르게 작성하는 법’은 다음과 같다. 꼭 들어가야 하는 문구. ‘나는 누구이고, 언제 어디서 무슨 잘못을 어떻게 저질렀는지, 그래서 누구에게 피해를 끼쳤는지, 얼마나 반성하고 있는지, 나아가 앞으로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절대로 들어가서는 안 되는 문구도 있다. ‘본의 아니게, 오해, 그럴 뜻은 없었지만, 앞으로는, 억울합니다, 그동안 힘들었습니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아쉽게도 위 기준을 충족하는 사과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래서 ‘사과를 잘하는 사람은 애초에 사과할 짓을 하지 않는다’는 농담 아닌 농담도 있다. 어쨌든 사회 지도층의 사과를 위 기준에 따라 사례별로 분석해보자.

 오래된 전범(典範)으로 1990년 일왕 아키히토의 ‘사과 아닌 사과’가 있다. 노태우 대통령의 방일 당시, 일왕은 일제의 식민지 지배에 대하여 ‘통석(痛惜)의 염(念)을 금할 수 없다’고 말했다. 사과를 받아야 하는 한국인들은 난리가 났다. 사과인지 아닌지, 통석의 뜻이 무엇인지, 일왕의 ‘혼네’와 ‘다테마에’가 무엇인지 말이다. 결국 식민지 지배에 대하여 ‘안타깝다’, ‘슬프다’ 정도의 감정표현이라는 해석이 정설이 되었고, 사과는커녕 한국민을 조롱하는 악랄한 예로 남았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건으로 검찰에 소환됐던 신현우 전 옥시 대표의 사과는 어떤가.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기 전 포토라인에서 기자들을 향해 연신 ‘피해자와 유가족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고 조아렸던 신 전 대표는 돌아서서 자신의 변호사에게 ‘내 연기 어땠어요’라고 말했다. 사과는 잘했지만, 연기는 못했다. 이를 전해들은 검찰관계자들은 충격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충격을 받은 검찰 관계자들은 어떤지. 검찰 출신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은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각종 의혹들에 대하여 ‘찌라시 수준의 소설’이라고 전면 부인하면서 기자들에게 ‘이런 일’로 거취표명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나아가 언론에 대한 불쾌감을 드러내면서 모욕감을 느꼈다고까지 했다. 일단 사과가 아니라서 평가할 수 없지만, 누가 모욕감을 느끼는지 되묻고 싶을 정도의 뻔뻔함이다.

 사과는 잘하는데 앞으로 어떻게 책임질 것인지 밝히지 않은 ‘속빈 사과’도 있다. 넥슨의 비상장 주식을 뇌물로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된 진경준 검사장의 사과는 무난한 편이다. ‘자신의 잘못된 행동에 대해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오늘 조사에서 사실대로 모두 밝히겠다’. 하지만 ‘조사에서 사실대로 밝히겠다’는 사람들을 그간 많이 본 국민들은 피로감을 느낀다. 사실대로 밝혀지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다. ‘민중의 개·돼지’ 발언으로 물의를 일으킨 나향욱 교육 정책기획관의 사과는 ‘눈물’이다. ‘지난 며칠간 밤에 못자고 힘들었다’. 요즘말로 ‘피해자 코스프레’다. 김현웅 법무부 장관의 사과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처벌’ ‘범죄수익 환수’ ‘시스템 전반의 강화’ ‘검사 윤리의식 제고’의 말들이 넘쳐난다. 다만, 퇴진의사가 없다고 했다. 형사재판에서 죽을죄는 지었지만, 죽을죄는 받고 싶지 않다는 피고인 같다. 국민들은 통석의 염을 금할 수 없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영주<법률사무소 신세계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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