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행합일(知行合一)의 참뜻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참뜻
  • 이동희
  • 승인 2016.07.27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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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에 사숙해 마지않는 선지식(善知識)으로부터 좋은 영상자료를 소개받았다. 중국에서 제작 방영한 <철학의 계보, 왕양명>이란 시리즈물이었다. 30회분으로 구성된 이 영상물은 시청하는 동안 내내 큰 감동을 안겨주었다. 필자는 이 영상물을 시청하면서 곧바로 왕양명(1472~1529)의 일생과 양명학에 관해 좀 더 알아보려고 몇 권의 책을 주문했다. 장르에 상관없이 좋은 작품은 더 왕성한 탐구 의욕을 자극하지 않던가!

 왕양명 드라마를 보면서 매회 감동이었다. 중국 명대(1368~1644)에 이런 실천적 지성인이 있었던가? 조선 시대 우리 선비들이 주자학보다 양명학을 선호하여 국가이념의 근간으로 삼았더라면 백성들이 살기에 얼마나 좋은 나라가 되었을까? 역사의 가정假定은 그야말로 놓친 기차 바라보기처럼 허탈하고 허무한 것이지만, 아쉬운 마음 금할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고 확립하려 한 철학적 사유와 사상의 범주는 깊고 넓기만 하다. 그중에서도 지성인이라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여기는 지행합일(知行合一)에 관한 견해가 특별했다. 지행일치(知行一致)에 관한 해석은 현대인들도 참고해야 할 만큼 탁월하다. 그동안 지행합일이라면 선지후행(先知後行)이라하여 ‘먼저 알아야 실행할 수 있다’거나, 혹은 ‘알았으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며 좋은 덕목이 실천 난감한 구두선(口頭禪)에 머물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왕양명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지행합일(知行合一)에서 ‘지-앎은 행-실천의 시작이고, 행-실천은 지-앎의 완성’으로 보았다. 이런 관점은 먼저 알아야 실행한다거나, 알았으면 반드시 실행해야 한다는 관점과는 전혀 다른 여지를 둔 것이다. ‘알아[배워]가면서 행[실천]하는 것이며, 행[실천]을 통해서 지[앎]을 완성해 간다’는 관점은 지행합일의 정신의 비중을 어디에 뒀는지를 구체화한 사례라 할 것이다. 관념적 지행합일과 실천적 지행합일만큼이나, 그 비중의 격차가 확연한 것이다.

 왕양명이 벽지인 귀주 한직으로 쫓겨 갔음에도 구애받지 않고 수처작주(隨處作主) 이르는 곳마다 주인 된 마음과 실천력으로 소수민족을 개화시키고, 현지인들을 가르치는 데 온 힘을 쏟는다. 이런 그의 학문과 인품에 감동한 현지인이 <문명서원>을 열어 후학을 가르치는 자리를 마련한다. 이 자리에서 왕양명은 <공부하는 사람의 네 가지 덕목>을 천명하는데, 그 내용이 지금 우리 사회에도 절실히 필요한 덕목이다.

 공부하려는 사람은 첫째 뜻을 세우라고 했다. 입신양명하여 출세하려는 뜻만이 아니다. 자신의 처지에서 최선을 다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설정하라는 것이다. 둘째 뜻을 세웠으면 근학(勤學)하라는 것이다. 부지런한 자체가 공부이며 지행합일에 이르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셋째 뉘우침을 중시하라 했다. 잘못이 없는 것이 최선이지만 사람이 잘못을 범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잘못했을 때마다 제대로 뉘우칠 수 있다면 잘못을 하지 않은 것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넷째로 어느 경우에도 선(善)을 따르라 했다.

 요즘 우리는 고시생-공시생[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 25만 시대에 처해 있다. 그런데 공무원이 되려는 사람들이 과연 국가와 국민의 공복(公僕)이 되겠다는 뜻을 세운 사람들이 몇이나 있을까? 잇달아 터지는 비리와 독직[瀆職-공무원이 지위나 직책을 이용하여 비위를 저지르는 일] 사건을 지켜보노라면 공무원 되려는 공부의 뜻이 오로지 개인의 영달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닌가, 의아하기만 하다.

 국가의 녹을 먹는 공무원이 국민을 개·돼지로 보고, 이런 신분제 사회를 더욱 강하게 구축해야 한다는 생각을 거리낌 없이 밝힌다. 비리를 척결하라고 칼을 쥐어주었더니 그 칼을 엉뚱하게도 자신의 금고를 채우는데 휘둘렀다. 자식에게 꽃보직을 맡게 하고 수백억의 재산을 지키는 데 최고 권력을 유감없이 활용하고도 모르쇠로 일관한다는 혐의를 받는 공직자도 있다. 민주국가의 주인인 국민도 모르는 사이에 오로지 최고 존엄 권력자의 명령에 따라 한 마디 협의나 설명도 없이 군사시설을 유치하겠다고 한다. 이런 사례들을 지켜보노라면 ‘민중은 개·돼지일 뿐’이라는 시각이 상층부에 고르게 분포되어 있음을 실감케 한다.

 이럴 때, 졸지에 개·돼지가 된 국민들이 지행합일 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왕양명 선생이 그랬지 않는가? ‘지는 행의 시작이고, 행은 지의 완성’이라고! 우리를 개·돼지로 여기는 자들을 우리의 동료는 고사하고 머슴으로도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늦게나마 죄 없는 손가락 자르지 말고 “우리를 깔보는 자들[담벼락]을 향해 욕이라도 해주자”(김대중 전 대통령) 그것이 지의 시작이자 행의 완성이 될 것이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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