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희 암향농월(暗香籠月) - 매화향기가 달을 품고
김재희 암향농월(暗香籠月) - 매화향기가 달을 품고
  • 김동수
  • 승인 2016.06.30 15: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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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의 금요 전북문단 / 7

 섬진강 물빛이 배인 매화가 어스름 내리는 길목을 기웃거린다. 무엇을 기다리는 것일까. 하나둘 떠나는 행인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신 매무시를 가다듬는다. 싸늘해진 바람결에 창백해진 표정이 더없이 청아하다.

  점점 어스름이 짙어지고 주위는 적적하리만치 고요하기만 하다. 간간이 꽃잎 벙긋거리는 소리만이 허공을 두드린다. 그때 서서히 동쪽 산등성이를 딛고 올라서는 보름달. 온 세상의 시선을 한 몸으로 받으며 만물과의 소통을 준비한다.

  매화꽃 가지에 걸린 달이 달빛을 품어낸다. 달빛은 어디에 내려앉는지에 따라 각각 다른 품격을 지닌다. 달빛과 매화가 만나 풍기는 향기를 일러 암향(暗香)이라 했던가. 아마도 이 세상에 그토록 고매한 향기는 없으리라.

  암향을 품어 내고 싶은 매화의 기다림이 간절하다. 보름달의 정기를 받아야만 한껏 무르익은 향기를 품어 낼 수 있을 텐데……. 수천만 개의 매화꽃은 간절한 눈빛을 보낸다. 달은 이들의 눈빛을 아는 듯 모르는 듯 그저 묵묵한 표정이다.

  그 묵묵함 속에 다정한 미소가 어려 있음을 매화는 모르는가. 행여 저 달이 그냥 기울어 버릴지, 자신의 꽃이 속절없이 다 져 버릴지 몰라 안타까움이 앞선다. 달빛이 이미 제 속에 들어와 흠뻑 젖어 있거늘, 젖어 있어도 젖은 줄 모르고 애달아한다.

  은은한 달빛에 어우러진 매화의 향이 더없이 향기롭다. 저렇듯 많고 많은 매화가 품어내는 향기로움이 어디로 다 스며들까. 그리움 한 줄기 담고 있는 마음에 스며들고 멍울 하나 감추고 살아야 하는 가슴을 삭혀 낸다. 도란도란 나누는 사랑의 밀어에 엉겨 붙고 토닥거리는 투정을 보듬는다. 동네 어귀에 서 있는 장승의 눈 밑에 걸터앉고 매화밭을 어슬렁거리는 강아지 꼬리에도 매달린다.

  장승은 암향이 풍기는 날엔 눈을 감지 않는다. 온밤을 뜬눈으로 지새운다. 강아지도 암향에 젖은 밤엔 짖지 않는다. 조용한 눈빛으로만 밤길을 지킨다. 지나가는 바람도 옷자락 여미고 밤하늘의 별들도 눈만 깜빡거린다. 밤길 걷는 나그네가 발걸음 옮기지 못하고 둥지 찾아드는 새는 소리 죽여 날개 접는다.

  그런 밤은 섬진강 물도 흐름을 멈춘다. 매화 향기와 달을 품은 채 가만가만 그림을 그린다. 거꾸로 보이는 세상에 더 아름다운 색을 입힌다. 행여 거친 붓질에 달이 놀래 달아날까 봐 잔물결에 물감만 흘려보낸다. 향기가 아무리 차고 넘쳐도 한 점 허술히 흘려보내지 않고 한 치의 흩뜨려짐이 없게 하려는 몸짓들로 봄날의 밤은 더 향기롭다.

  어느 달빛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마음속에 암향이 스며든다. 희어가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어쩐다요.’를 되뇌는 모습이 꼭 저 매화꽃이다. 달빛에 젖어 있어도 젖은 줄 모르는 매화처럼 암향에 취해 있어도 취한 줄 모르는 여인. 비록 자신이 피워내지 못해도 피워내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사는 그 자체가 값진 향기에 젖어 있는 것이라는 걸 모른다.

  매화 꽃잎 흩날리어 꽃비를 뿌리는 날, 달빛은 서서히 숨을 줄이리라. 생명이 다했다 하여 서러워하지도, 할 일을 다 하지 못했다 하여 아쉬워하지도 않으리라. 누가 떨어진 꽃잎에 함부로 발자국을 남길 수 있을까. 누가 사위어 가는 저 달에 미련 없이 손사래 칠까.

  섬진강 변에 배인 암향이 제 살 짓눌러 더 농축된 향으로 승화되는 날, 봄날은 가리라. 흐드러졌던 매화가 꽃비로 흩날리며 사위어 가는 달의 침묵을 품고 승천하는 날, 봄날은 가리라. 한 여인의 “어쩐다요.”가 속절없이 메아리치며 봄날은 가리라.
 

 <약력> 수필과비평으로 등단,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행촌수필문학상, 전북수필문학상, 수필과비평문학 수상

 전북수필 편집주간, 전북수필과비평 편집국장,

 저서 : 《저 장승이 갖고 싶다》, 《꽃가지를 아우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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