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며들다
스며들다
  • 이흥재
  • 승인 2016.06.22 1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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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어사전에는 ‘속으로 배어들다, 마음깊이 느껴지다’라고 ‘스며들다’라는 말의 뜻을 풀이하고 있다.

 날씨가 좋은 한낮 보다, 이른 새벽이나 늦은 저녁 혹은 밤에는 고요하다. 그럴 때면 산은 강 속으로, 강은 산속으로 스며들어 강과 산 모두 하나가 된다. 이렇게 조용할 때는 빛이 어둠 속으로, 혹은 어둠이 빛 속으로 스며들어 강산이 모두 적요하다. 적요는 고요할 적(寂), 고요할 요(寥)자로 고요함의 극치로 바로 적적(寂寂)한 상태가 된다. 그때 오히려 새 생명이 태어나는 신화가 피어난다.

 최근 몇 번 새벽녘 인시(寅時)에 산속에 머무른 적이 있었다. 새벽녘 4시 40~50분쯤 되면 마치 모닝콜을 듣고 일어난 듯 온갖 새들의 소리가 마치 오케스트라처럼 환상적인 음악을 연주하는 듯하다. 그리고 개구리들이나 온갖 벌레들은 코러스를 맡아 합창이 이루어진다. 이보다 더 아름다운 교향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황홀한 느낌이 든다. 바로 어둠이 서서히 빛 속으로 스며들 때이다.

 또한 오후 해질 무렵 들판에 서보면 하늘의 천변만화하는 색은 말로 다 형언할 수 없다. 바로 빛이 어둠 속에 스며들 때 이렇게 또 하나의 감동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른 새벽 촬영을 나가면 고요함 그 자체이다. 세찬 장대비가 휘몰아치거나, 함박눈이 펄펄 정신없이 내릴 때도 역설적으로 고요함을 느낀다. 그럴 땐 산과 강, 물과 나무, 비, 눈 모두가 서로 스며든다.

 비오는 날 상관저수지 수면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무채색들이 마치 어린아이들 놀이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진다. 새끼 불재를 휘감고 도는 새벽 안개는 마치 색들이 산책하기도 하고, 빠른 걸음으로 걷기도 하고, 때론 뛰어가는 것처럼 살아서 움직인다. 이런 색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표현해 보고 싶은 강한 충동에 사로잡힌다.

 초겨울 안덕마을 앞 빨간 홍시들이 달려있는 감나무 주변이 순식간에 고요해지며 함박눈이 휘몰아쳤다. 하얀색들이 율동하며 무용하듯 감과 감나무 속에 스며들어 서로 하나가 되었다. 순간 숨이 멎은 듯 아름다운 한 폭의 풍경화가 탄생했다.

 함박눈이 수북이 소담스럽게 쌓인 지난겨울, 구이저수지 호숫가 나뭇가지에 하얗게 눈이 쌓인 게 물속에 그대로 거울처럼 비쳤다. 나무가 물속에, 물이 나무에 스며들어 무심의 경지를 이루었다. 구이 원안덕 마을 근처의 호수에는 하얗게 눈이 쌓인 봉우리가 짙은 코발트색 겨울 호수에 스며들어 한 폭의 그림을 그려냈다.

 20세기 현대 미술의 아버지 세잔은 눈보라가 몰아치는 날은 색들이 뛰어다니다 잠시 숨을 고르면서 쉬는 것이라고 했다. 세찬 비바람이 불 때 빗줄기가 움직이는 게 아니라 색이 달려가는 것이다.

 세잔이 추구한 것은 우리에게 새로운 것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거나 우리 주위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또한, 메틀로 퐁티도 같은 맥락의 얘기를 했다. 그는 ‘예술가란 대부분 사람들이 참여는 하지만 진정 바라보지 못하는 광경을 포착하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멈추어 천천히 볼 때 고요함이 느껴진다. 강산이 적요할 때 이 세상 만물이 서로 스며들어 하나가 된다. 산과 강, 어둠과 빛뿐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하나가 될 때 새 생명이 태어나는 것이다.

 예술은 이 세상에 없던 새 생명을 낳는 일과 똑같다. 이렇게 태어난 예술에 대해 당나라 시인 사공도(司空圖)는 말했다.

 매실은 시고

 소금은 짤 뿐이지만

 아름다움은

 시고 짠맛

 그 너머에 있다.

 항상 수졸(守拙)하며, 사람들 삶 속에 스며들며 살고 싶다.

 이흥재<무성서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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