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눈 오는 날 - -눈가에 눈이 내려앉는다
첫 눈 오는 날 - -눈가에 눈이 내려앉는다
  • 김동수
  • 승인 2016.06.09 14: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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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의 금요 전북문단 / 6. 이정숙

  온통 회색빛이다. 며칠 전부터 우울증에 걸린 하늘이 응어리를 풀어내기 시작한다. 늦은 첫눈이다. 겨울이니까 올 때가 되면 오겠지 하고 눈을 기다리진 않았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근 한 달이 늦어진 첫눈이 그것도 함박눈으로 펑펑 쏟아지는데도 반갑지 않은 친구의 방문처럼 난 심드렁하다. 도로에 쌓여가고 있는 눈을 보며 탄성은커녕 딸내미 아이를 돌보고 있는 지금 집에 갈 걱정을 하고 있다.

  내가 왜 이러지? 생활이 바쁘다 보니 일시적으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것인지, 아니면 한물가버린 바람 든 무처럼 늙어버린 것인지. 눈이 오면 무엇이 있을 것 같은 막연한 설렘과 낭만은 어디로 도망가 버리고 언제부터인가 나는 자식의 하인이 되어 전전긍긍하고, 손녀딸을 보며 무엇이 그리 좋다고 히죽히죽 웃으며 행복해하는 할머니가 되어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눈 내리는 겨울밤을 하염없이 걸었었다. 그때도 오늘처럼 첫눈이 폭설로 내렸던 밤이었다. 시간도 거리도 개념을 풀어놓고 마냥마냥 걸었다. 같이 걷는 사람이 안 좋은 것은 아니지만 그도 나도 순전히 눈이 좋아 같은 마음으로 동행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한 호흡을 하듯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눈 오는 밤을 즐겼다. 밤을 새워도 모자랄 만큼 눈이 좋았다. 이따금씩 느릿느릿 지나가던 차들이 어디까지 가느냐며 태워다주겠다고 몇 번을 세웠지만 우리는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며 너희들이 우리의 낭만을 알기나 해 하면서 객기를 부렸다.

  조심조심 운전을 하며 집으로 향한다. 눈이 애물단지다. 어쩜 삽시간에 온 천지를 이렇게 하얗게 덮을 수가 있을까.

  집에 가는 길에 거치는 아울렛매장 상가 앞이다. 차를 세운다. 두리번거리다 젊은이들이 주로 드나드는 매장에 발길을 옮긴다. 주인은 없고 종업원인 아가씨 혼자서 저녁을 먹고 있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식사하라고 해놓고선 아주 찬찬히 옷 전부를 하나하나 살핀다. 마치 내 집의 옷 방에서 옷을 입어보듯 탈의실을 들랑날랑한다. 젊어 보이는 몸에 딱 달라붙는 바지 두 개와 남방 하나를 고른다.

  그런데 왜 그런지 근원 모를 허기와 갈증이 갑자기 엄습하며 헛웃음이 나온다. 종업원한테 커피 한 잔 부탁하여 마신다. 값을 물으니 겉옷도 아닌 것이 기십만 원이란다. 잠깐 망설이는데 오늘같이 기분 우중충한 날은 이 정도는 눈 딱 감고 선물할 필요도 있다고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구매를 부추긴다.

  계산을 하려 하는데 아가씨가 “ 그 나이에 몸매가 참 좋으셔요. 어떻게 관리하셨기에 힙도 안 쳐지고 엄청 젊어 보여요.”하고 너스레를 떤다. “아가씨가 내 나이를 어떻게 아는데 그렇게 말을 해요.” “오십대 중반 정도 아니에요?” “내가 그렇게 보여요? 아닌데요.” “어머 진짜 젊으시네요.” 그 소리가 상업성 립 서비스인 줄 뻔히 알면서도 싫지 않다.

  한때는 앳되단 말이 싫은 적이 있었다. 일찍 결혼해 어린 나이에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마흔 즈음까지는 나이를 물어오는 사람들에게 몇 살을 올려 말을 했다. ‘아가씨 같은데 아이가 셋이나 있네요.’하는 그 말이 얼마나 창피하던지. 빨리 나이 먹기를 바랐다. 그런데 지금 그런 나이가 되었다.

  내일 후회할지도 모를 옷값을 지불하고 막 나오는데 하필 눈가에 눈이 내려앉는다. 눈에 물이 그렁하다.
 

  <약력> 수필집 <<지금은 노랑신호등>>, <<내 안의 어처구니>>  작촌예술문학상, 온글문학상 수상.

  전북문협수필분과위원장 (현)
  전북펜문학 부회장(현)
  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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