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습기 살균제, 누구의 책임인가
가습기 살균제, 누구의 책임인가
  • 권영후
  • 승인 2016.05.12 1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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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우리 사회는 가습기 살균제가 일으킨 사회적 죽음이라는 재난에 시달리고 있다. 2001년 유해물질로 판명된 첫 제품 출시, 2006년 폐질환 사망자 발생, 2011년 질병관리본부의 사용 자제 권고, 2016년 정부의 진상규명 착수까지 15년이 걸렸다. 그동안 200명 넘게 사망했다. 앞으로 완벽한 진실을 밝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소요될지 알 수 없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이슈화에 성공했지만, 곳곳에 지뢰가 널려 있는 형국이다. 4만종이 넘는 화학물질에 대한 소비자들의 불안감도 커지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사고에 직간접으로 관련된 기업, 정부, 국회, 전문가, 언론은 변명하고 책임 떠넘기기에 바쁜 모습이다. 이번 재난에서 스스로 ‘내 책임이요’하고 손을 든 집단은 없다. 국가를 이끌어 가는 중추 세력의 무책임 무능은 재난의 악순환을 초래하고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할 가능성이 크다.

 먼저 사건의 규모를 축소하고 은폐하려는 옥시를 비롯한 제조업체의 무책임한 행태는 오히려 국민의 공분을 키웠다. 이윤을 목표로 움직이는 기업한테 사회적 책임이나 시민에게 끼치는 해악을 따지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 되어 버렸다. 기업 활동의 자유를 확대하라는 규제 철폐 요구에는 가습기 살균제 같은 유해물질의 생산 판매와 관련된 항목도 포함되어 있다. 시장 질서를 주도하는 기업이 시민의 안전과 생명을 보호해줄 거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규제완화가 만병통치약이 아니라는 점을 새롭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이 사건을 인지하고 문제의 심각성을 깨닫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했다. 윤성규 환경부 장관은 2013년에 “가습기 살균제 같은 화학물질의 부작용을 모두 파악하기엔 인간의 예지능력과 과학적 지식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변명이기보다는 궤변에 가깝다. 정부가 사태 발생 이전부터 시행되고 있는 유럽이나 미국의 사용금지 규정을 제대로 파악했다면 이런 참사는 예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정부·기업의 공생관계, 관료제의 병리 현상이 결합하여 발생한 재난 앞에 정부는 없었다. 진정한 사과는 없고 책임회피에 급급할 뿐이다.

 국회는 국민의 여론을 수렴하여 국정에 반영해야 할 의무가 있다. 사건 발생 이후 허다한 문제 제기와 청원이 있었음에도 피해구제는 기업과 개인 간의 문제로 치부하여 관련법 제정을 차일피일 미뤘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국회는 공정한 잣대로 국민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기업 같은 힘있는 집단의 로비나 의견에 쉽게 귀를 기울이는 경향이 있다. 힘없는 국민에게 국회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대량의 희생자가 발생하고 국민 여론이 움직일 때만 호들갑을 떠는 일이 다반사다. 이제부터 국회의 위기 대응방식은 바꿔야 한다.

 이번 재난은 연구·법조 전문가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지고 있음을 보여줬다. 대다수는 높은 도덕 수준을 유지하고 있지만, 일부는 재력에 굴복하여 기업이 재난을 일으킨 책임을 회피하게 하는 방패막이 역할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재물 앞에 인간의 생명은 가볍게 취급된 것이다. 위기가 가중될수록 전문가의 도덕성은 중요하다. 위기나 재난을 해결하는 최상의 전략은 도덕성, 책임감, 투명성을 바탕으로 한 고도의 전문성으로부터 나온다. 전문가의 역할을 돈벌이 수단으로만 이용하려는 사회분위기를 경계해야 한다.

 언론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다. 언론의 사명은 사회 문제를 파헤쳐 공론화하고 해결 방안을 찾도록 유도하는 데 있다. 언론은 초기 단계에서 기업의 의견을 중시하고 피해자의 주장을 외면했다. 재난의 의제화에 손을 놓은 것이다. 검찰 수사를 계기로 뒤늦게나마 이슈화하여 해당 기업의 사과를 이끌어 낸 것은 다행한 일이다. 하지만, 옥시에게 모든 책임을 씌우고 다른 국내 제조업체는 거의 취급하지 않거나, 피해 실태와 생활화학제품 전반에 대한 후속 탐사 보도가 부족하다는 비판은 여전히 남아있다.

 심각한 재난은 개인과 사회를 탈바꿈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메르스,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등 끊임없는 재난 앞에 무기력한 모습만 반복해서 보여줬다. 위기에 무능한 사회 구조를 성찰하고 공유하는 일이 미래의 위험을 사전 제거하기 위한 첩경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가습기 살균제 관련 집단·개인의 책임 소재를 명확히 하는 일은 사태의 완전한 해결을 위한 필수 조건이며 국민의 엄중한 명령이다.

 권영후<소통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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