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수의 세상살이] 한 줄의 김밥
[정성수의 세상살이] 한 줄의 김밥
  • 정성수
  • 승인 2016.05.03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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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년의 소풍이나 운동회 날 점심시간의 단골메뉴는 김밥이다. 김밥은 김발 위에 김을 가지런히 놓고 고슬고슬한 밥 한 주걱을 얇게 골고루 편다. 그런 후 햄, 당근, 살짝 데친 시금치, 계란지단, 오이 등 준비한 재료를 올려놓은 후 김발을 함께 만다. 이때 밥의 첫 부분과 끝부분이 만나도록 강도를 조절해 가면서 말아 준다. 먹기 적당한 크기로 잘라 접시에 담아내면 훌륭한 김밥이다. 은박지를 깐 접시 위에 잘라 논 김밥 한 줄은 문장에서 무음 상태나 문장의 요약을 나타낼 때 사용하는 기존의 점 6개짜리 말줄임표(……)다. 설명이나 사족을 붙이지 않아도 간단하고 명료한 말의 울림이다. 뿐만 아니라 감정을 억누르고 있는 함축언어이자 함부로 말할 수 없는 침묵이다.

  김밥은 ‘김+밥’으로 김이 주체다. 일연 스님이 쓴 ‘삼국유사’에는 신라시대부터 ‘김’을 먹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신뢰할 만한 문헌으로는 ‘경상지리지’가 처음이다. 조선 초기 경남 하동 지방의 토산품으로 해의海衣(김의 또 다른 이름)가 전해지고 있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병자호란 때 의병장이었던 김여익이 전남 광양 태인도의 바닷가에 표류해 온 참나무 가지에 김이 붙은 것을 보고 양식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때부터 김여익의 성姓을 따 ‘김’이 되었다고 한다. 기록으로 보아 400년여 전 부터 김을 양식 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의 김밥은 식초가 들어있지 않은 맨밥의 형태로 참기름과 소금으로 간을 하여 고소한 맛을 강조한다. 썰었을 때의 미적인 외형보다 푸짐하게 맛을 강조한 실용적인 면모로 군침을 흘리게 만든다. 김밥 한 줄은 가장 간소한 밥상이다. 반찬이라고 해야 단무지 몇 쪽에 간장물 한 종지면 끝이다. 위에서 보면 모양과 색깔이 같지만 잘라놓고 보면 알록달록한 김밥. 기름이 반지르르하게 흐르고 깨소금까지 얹힌 김밥은 보는 각도에 따라 느낌도 다르고 맛도 다르다. 우리의 삶도 이처럼 오색 빛으로 Colorful 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만 해도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요즘 아이들이 좋아하는 누드김밥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인생도 한 번쯤 뒤집어 살고 싶어진다.

  김밥은 절단해야 진짜 속을 보여준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듯 단단하게 말렸던 검은 외피도 알고 보면 한 겹의 위선이다. 위선이야 말로 내숭이자 두루뭉술한 삶이다. 인간의 내면 역시 얇은 보호막에 의존하는 한 줄의 김밥과 다를 바 없다. 김밥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마치 레일을 벗어나지 못하며 달리는 기차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맥박이 뛰고 숨소리가 들려오는 것처럼 생동감과 긴장감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김밥은 아랫목에 앉아서 마음 놓고 먹는 따뜻한 밥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편안한 밥을 먹을 때는 반찬 투정도 하지만, 한 줄의 김밥을 먹을 때는 삶이 엄숙해지고 삶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허기보다도 먼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말줄임표 같은 김밥 한 줄은 다하지 못한 말들 같다. 간절한 말 몇 마디로 이루어진 한 줄의 문장이다. 한 줄의 김밥은 가슴깊이 묻어두고 싶은 절실한 말줄임표(……)다.

 정성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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