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고백
아버지의 고백
  • 이신후
  • 승인 2016.05.02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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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60년대 말 어느 어린 소년의 등하굣길은 진창길에 고무신이 푹푹 빠지고, 점심에는 학교에서 돼지 빵이라는 옥수수 빵을 반으로 쪼개어 한 조각씩 나누어주는 것으로 허기를 채웠다. 언제나 굶주려 있던 어린 시절, 제 주린 배보다 집에 남아 끼니를 기다리는 동생들 생각에 크게 입을 벌리지도 못하고 조금 베어무는 것이 다였다. 그마저도 하굣길 도중에 수시로 어느 마을의 누군가에게 뺏기기 일쑤였다. 그때 무한한 서러움을 배운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동네 형의 꼬임에 넘어가 학교에 나가지 않고 방공호에 숨어 놀다 학교에 다녀온 체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날이 있었다. 금세 눈치를 채신 어머니는 조용히 불러 마당에 널어 두었던 콩대를 들고 오시더니 종아리를 때리시며 우셨다. 그 이후로 한 번도 학교를 빼먹은 적이 없었다. 그 눈물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고교입학시험 첫해에 원하는 전주에 있는 고등학교에 합격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학교를 선택하지 않고 다시 한 번 도전하기로 했지만, 시골에서는 학원이나 과외 또는 독서실 같은 곳에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하는 수없이 이미 졸업하고만 학교에 찾아가 3학년 교실의 맨 뒷자리에 앉아서 다시 공부하게 되었고, 결국 1년 후배들의 교실에서 그들과 더불어 공부하게 되었다. 선생님은 등하교 시간을 절약하자며 본인이 하숙하고 계신 학교 앞 친구 집에서 함께 있자고 권유하셨다. 그런 계기로 한동안은 친구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한참 사춘기를 겪을 그 어린 나이에 아무리 친구집이라 해도 절로 눈치를 보며 밥 때가 되면 한 톨이라도 흘릴까 긴장 속에서 식사해야만 했고 문소리가 신경 쓰여 한참을 씨름하기도 했다. 그때의 외로움이 지금도 남아 있다. 결국, 답답함을 해소하고자 생각해 낸 것이 웅변이었다. 가슴 속에 불덩이같이 차오르는 울분을 뱉어내는 일, 그렇게 책 한 권을 구해서 숲 속에 들어가 혼자서 소리치며 웅변을 하기 시작했다. 그 어린 나이에 가장 어렵고 외로운 시기에 웅변 덕택에 겨우 스스로를 달래면서 지낼 수 있었다. 어렸을 적 고됐던 과거의 상처와 흔적은 단지 기억 뿐만은 아니었다. 그때의 웅변은 화법에 도움이 되었고 또한 상대의 말을 경청하려는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

 어느덧 성인이 되어 가정을 꾸리게 되었지만, 결혼 생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보증금 50만원에 월세 5만원, 그 단칸 월세 방의 부엌에서 연탄보일러로 물을 덥혀 부엌에 쪼그리고 않아 샤워해야 했다. 열악한 그곳에서 아이를 둘이나 낳아 길렀으니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 미안할 뿐이다. 아버지로서 내가 겪은 상처만큼은 피하게 해주고 싶었는데 결국 똑같은 상흔을 아이들에게 입히고 말았다는 생각에 더욱더 아이들에게 공부를 강요하게 되었고, 그 아이들은 큰 압박을 느끼며 학창시절을 보내게 되었을 것이다. 어느 정도 형편이 나아질 때쯤 쌍둥이가 태어나 잘해줄 기회를 마저 잃게 되었으니, 마음이 다 시리다. 다행히 아이들은 아버지의 우려와 다르게 다행히 잘 자라주어 대학에 입학하였다. 큰아이는 외국어대학교에 합격했음에도 결국 학비로 인해 가고자 하는 곳에 보내지 못했다. 두 아이 모두 등록금을 대줄 여유가 없어 어쩔 수 없이 각자 학자금 대출을 받아 학교에 다녀야만 했다. 큰아이는 간호사를 그만두고 원했던 영어공부를 위해 외국에 홀홀단신으로, 그러나 당당하게 직장을 얻어 생활하게 되었다. 얼마 전 큰아이는 호주에서 잠시 귀국하여 본인의 학비를 모두 갚고 동생들에게 옷이며 신발이며 많은 선물을 해주며 무척 행복해 했고 둘째 아이 역시 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열심히 아끼고 아껴 학자금 모두를 갚았다고 한다. 그러나 여전히 한편에는 끝끝내 지원해주지 못하고 자식에게 짐을 지웠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겁다.

 한 자밤의 바람도 들어오지 않게 문을 꼭꼭 걸어 잠가주는 것이 진정한 부모의 역할일까, 아니면 바람을 맞는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옳은 것일까. 가끔 학부모님들께 강의하면서 아이들 양육에 대해 얘기할 때가 많은데 정작 나는 아이들에게 상처만 준 것이 이토록 후회되고 가슴이 아프다. 그런 경험은 자산이 되어 어렸을 때의 서러움과 외로움이 오히려 지금의 존재로 잘 성장하게 해준 밑거름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지만, 아버지로서 아이들에게까지 그 경험이 마땅하다고 강요할 순 없다고 생각한다. 치열하게 유년기를 보냈던 나의 어린 딸이 이제는 호주의 땅으로 건너가 당당하게 활동하고 있는 모습이 감사하고 자랑스럽기 그지없다.

 바람이 부는 곳에서 자라는 들꽃은 건강하고 향기롭다. 봄이 오기 위해서 우리 씨앗은 바람을 맞아야 움이 트고 싹이 난다. 그것은 상처가 아니고 성장이다. 연두빛 5월에는 아내와 네 명의 자녀와 더불어 약간 높은 언덕에 마주앉아 불어오는 바람을 맞을 날을 계획해야겠다. 그 바람에 아이들 가슴의 상처가 아물어졌으면 하는 바람이 사치가 아니길 바란다.

 이신후<전북문화콘텐츠산업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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