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생각
엄마 생각
  • 이동희
  • 승인 2016.05.01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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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식은 나이를 먹어도 엄마 앞에서는 어린애일 뿐이다. 그래서 어머니-어머님이 아니라, ‘엄마’라고 불러야 엄마의 정이 느껴진다. 어머니는 의식이 자리 잡은 뒤에 구사하는 성인어(成人語)라면, 엄마는 아직 생존 본능만이 전부인 어린아이가 구사하는 유아어(幼兒語)다. 누구는 어른이 돼서도 엄마라고 호칭하는 이를 가리켜 의식이 덜 여문 철부지로 치부하기도 하지만, 육친의 정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살가움을 엄마라는 호칭에서 앗아갈 수는 없다.

 이는 아빠의 경우와는 사뭇 다르다. 성인이 되어서도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기도 쉽지 않고, 그렇게 부르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일상에서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는 성인을 목격한다면 진짜 의식이 덜떨어진 철부지로 치부해도 마땅하다 할 것이다. 무엇이 이 두 호칭이 가진 느낌을 다르게 할까? 말할 것도 없이 부모 역할의 다름에서 오는 자연스러움일 것이다. 엄부자모[嚴父慈母-엄격한 아버지, 자애로운 어머니]라 하지 않던가, 그런 살가움이 사람의 의식에 사랑의 지문을 남겼으리라.

 5월은 가정의 달이다. 1일은 근로자의 날이고, 5일은 어린이날이며, 8일은 어버이날, 11일은 입양의 날, 15일은 가정의 날이자, 스승의 날이다. 또한 16일은 성년의 날이고, 21일 부부의 날까지 모두 이달에 모여 있다. 가히 ‘가정의 달’다운 상달 중의 상달이다. 이런 모든 날들의 기원을 하나만 꼽으라면 부모를 들게 된다. 그 중에서도 ‘엄마’의 자애로움이 몸에 밴 살가운 정서만이 이 모든 날들을 의미 있게 지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어느 시인은 ‘향’은 사실이지만, ‘향기’는 문학이 된다고 했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모든 방향으로 열려 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지향하기를 좋아하는 곳은 늘 ‘아픔이 있는 곳’이다. 지난 일들이 누구에게는 ‘사실’이 되고, 누구에게는 ‘추억’이 되는 것도, 체험이 지향하는 마음의 방향에 따라 달라질 뿐이다.

 이를테면 이 시인에게 엄마 생각은 ‘걱정’이 전부였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추 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기형도「엄마 걱정」전문)

 엄마로부터 자애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자란 사람에게는 가난마저 살가운 추억이 되며, 시들고 시린 시절마저 눈시울을 적시는 공감의 힘이 된다. 이렇게 궁핍한 가운데 받은 모자란 사랑이 있어, 오히려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 걱정’으로 부박(浮薄)한 현실을 견뎌내는 힘-원동력을 얻는 것이다. ‘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과유불급(過猶不及)’는 격언이 괜히 생긴 말이 아니다. 물질적으로 넘치지만, 엄마의 사랑을 온전히 누릴 수 없는 현대의 아이들, 이들이 자라서도 ‘엄마 걱정’을 하면서, 살가운 엄마의 정으로 힘든 세상을 견뎌낼 수 있을까?

 필자에게도 비슷한 체험이 있다. 6.25전쟁을 전후한 우리 사회-우리 시대의 삶은 누구나 궁핍했다. 그럴 때 우리 엄마도 삼십 리가 떨어져 있는 대처[전주]까지 푸성귀를 이고 걸어서 몇 번인가 행상을 다녔다고 한다. 시골에서는 넘쳐나는 푸성귀를 도시의 푼돈과 바꾸려는 뼈아픈 고행이었으리라. 나중에 나이가 들어 이 이야기를 들으며 우리 엄마가 그런 무참한 노릇을 하도록 방치한 형이나 누나들에게 벌겋게 화를 내며 분노했단 기억이, 이 작품 <엄마 걱정>을 읽을 때마다 되살아나곤 한다.

 그러고 보면 한 편의 시가 독자의 미감에 작용하는 것은 전적으로 독자의 체험과의 공유-공감의 맥락임을 알겠다.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의 ‘사건’보다, 오히려 괴롭고 불행했던 시절의 ‘추억’이 우리를 인간미 넘치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힘이 된다.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으로 제시된 화자의 어린 시절을 공감하는 순간, 시는 단순한 언어의 차원을 넘어 삶의 영역으로 승화되는 것을 실감한다.

 올해 가정의 달-기념일들에는 지난 시절의 아픔을 추억으로 떠올리며 부박(浮薄)한 삶의 전선에 아름답고 견고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계기를 마련했으면 좋겠다. 그런 뜻에서 시는 매우 유효한 생활 예술이 될 소지가 충분하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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