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가 꽃이다 - 생은 그냥 점과 선들의 줄지은 보행
천지가 꽃이다 - 생은 그냥 점과 선들의 줄지은 보행
  • 김동수
  • 승인 2016.04.28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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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수의 금요 전북문단 4. 이주리

 지리산의 봄은 노란색으로 시작한다. 같은 황색이라도 노랑색과 노란색은 느낌이 다르다. 노랑색은 어쩐지 유치원 아이들의 가방 같기도 한, 줄지은 병아리들의 산책 같기도 한 느낌을 주지만 노란색은 좀 더 성숙한 여인의 교태 같기 때문이다.

  삼월이 되면 산수유는 겨우내 참았던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내듯 앙증맞은 애교를 가지 끝에 팝콘처럼 토해 놓는다. 그녀의 자지러진 노란색의 교태가 입김이 되어 귓가를 간질인다. 

  사물에 성性을 부여한다면 산수유는 확실히 여성이다. 그것도 소녀가 아닌 농염한 여인네의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의 빛깔이다. 거기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른다면 정말 그것은 속삭임과 입김의 하모니가 되는 것이다. 이들의 오케스트라를 듣는 사람들의 귓가가 간질거린다. 이들의 빛깔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오카리나 색이다. 이들을 보는 사람들의 눈가는 추억으로 촉촉해 진다.

  나는 이때가 되면 초경하는 소녀처럼 정서가 불안해진다. 까닭 없이 가슴이 뛰고, 책임이나 일상은 저만치 물러나 절대 나에 속한 것이 아닌 것인 양 팔짱을 끼고 아주 상관없는 표정으로 날 쳐다본다.

  이맘 때 쯤 이면 나는 아침밥이라든가 청소, 직장의 컴퓨터와 업무 등 일상을 쓰레기통에 쑤셔 박고 살짝 미친 여인처럼 꽃을 달고 지리산 어느 자락을 헤매고 싶어진다. 사람들은 미쳤다고 손가락질 할지 모르지만 자신은 얼마나 그저 해맑게 행복할까? 또한 중학교 때 좋아했던 영어 선생님의 책상에 놓여졌던 서툰 고백처럼 노란색의 봄에게 어눌한 편지로 수줍게 고백을 하고 싶어지기도 하는 것이다. 도대체 난 이 봄을, 이 노란색을 몇 번이나 더 볼 수 있을까?

  황석영의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에서 유신정권에 반대하는 운동권 출신 주인공이 감옥에서 국사범으로 무기징역을 받고 복역하던 중 사형집행을 6년째 미루어온 사형수의 마지막이 나온다. 어느덧 집행의 시간이 오면 ‘1405호!’ 하고 번호로 부른다지. 사람의 인생이 끝나는 순간치고 이렇듯 간단한 호출이 있을까? 생각해보면 사람은 누구나 사형수이다. 인생이라는 감옥 에서 삼년 형, 십년 형, 그나마 무기징역으로 구제될 가망성은 어느 누구도 없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1405호!” 하고 부르면 “네!” 하고 따라 나설 뿐.

  누군가에게 나는 그들의 수명을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당신은 몇 년이나 사형집행을 유예 받았나요?” 하고. 그리고 영원할 것 같은, 누구도 그 무엇도 상관없을 것 같은 두 사람 사이의 사랑에 대해서도 이렇게 물어 볼 것이다.

  “당신은, 아니 당신의 사랑은 시간을 이길 수 있나요?” 하고. 투사처럼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큰 소리 치지 말자. 툭하면 죽고 싶다고 엄살도 피지 말자. 그저 말 잘 듣는 아이처럼 “1405호!” 하고 부른다면, “네.”하고 따라가자. 한 세상 살면서 우리에게 유예 받은 시간들만이 진실이다.

  그 순간순간들의 점들이 모아져 선이 되고 급기야 입체가 되고 그래서 인생이란 직조가 완성 되는 것이겠지. 생은 그냥 점과 선들의 줄지은 보행이 있을 뿐이다.

  조금 있으면 노란색 대신에 수줍은 분홍의 벚꽃과 하얀 목련이 저들의 삶의 보행을 계속할 것이다. 아름답다든가, 힘들다든가 이런 것들은 그들 자신에게 있어서 관계없는 것들이다. 그저 시간의 순리에 맞게 묵묵히 그들의 할 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지리산은 지금 천지가 꽃이다.
 

 <약력> 
    경남신문 신춘문예 수필부문 당선
 현대시문학 시 부문 신인상 당선
 현대문학수필작가회 회원
 <미당문학> 편집위원

 시집 <<도공과 막사발>> 현) 고용노동부 전주고용센터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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