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짇날의 풍속
삼짇날의 풍속
  • 고재흠
  • 승인 2016.04.07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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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3월 3일을 “삼월 삼짇날”이라고 한다. 이날은 봄을 알리는 명절이다. 이맘때가 되면 산과 들에 개나리꽃, 진달래꽃이 탐스럽게 피어나고 나비가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추운 겨울을 피해 음력 9월 9일경 강남에 갔던 제비들도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한다. 이처럼 완연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때이다.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3이라는 숫자가 겹치는 3월 3일, 삼짇날을 매우 길하게 여겼다. 이 무렵은 태양의 황경(黃經)이 140°로서 우리 인간이 살아가기에 아주 좋은 때라고 한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따르면 농업을 위주로 살았던 우리 조상들은, 무엇보다 가정이나 정부에서 오직 풍년을 기원하는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열었다. 특히 농경제(農耕祭)는 큰 행사로 진행하였다. 고구려 때는 온 백성이 모여 사냥대회를 열고, 거기서 가장 활약을 많이 한 사람은 장수로 임명하기도 하였다. 한편 꽃놀이를 간 사람들은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봄의 정취를 마음껏 즐겼다고 한다.

삼짇날은 양수(陽數)중복일 풍속의 하나이다. 음양설(陰陽說)로 숫자는 홀수가 양이고 짝수가 음기이다. 그러므로 양기가 겹치는 날은 왕성한 양의 기운이 넘치는 날이기에 예로부터 커다란 명절로 여겨져 왔다.

3월 3일 삼짇날, 5월 5일 단오, 7월 7일 칠석,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은 모두 커다란 명절이었다. 특히 3월 3일은 만물이 소생하는 왕성한 만춘(滿春)의 봄기운으로 인하여 야외에서 이루어지는 풍속이 많은 날이다.

3월 3일 삼짇날을 옛말에 “삼질”이라고도 하였는데 육당 최남선(崔南善)학자에 의하면 삼질은 삼일의 자음(字音)에서 변질하여 파생된 것이라고 밝혔다. 신라 시대부터 여러 가지 행사가 있었으며, 이 풍속은 조선으로 이어져 오고 있다고 했다. 또한, 상사일(上巳日)이 일정치 않음을 불편하게 여겨 마침내 3월 3일로 정착되었다고 한다. 삼짇날의 명칭은 여러 가지가 있다. 상사·원사·중삼·상제·상사일·답청절((上巳·元巳·重三·上除·上巳日·踏靑節) 등 많기도 하다. 특히 상사일은 3월의 첫 뱀날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 길조가 있는 날이라고 했다.

 또한 삼짇날은 “여자의 날”이라고도 불린다. 유교사상을 숭상하는 가문에서 그간 여러 가지 사정으로 친정 나들이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가규(家規)가 엄하여, 생활이 곤궁하여, 시집살이가 심해서, 등으로 친정 부모님을 찾아뵙는 근친(覲親)이 어려웠다. 항상 집안 살림에 얽매어 살다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산새가 울고 아름다운 꽃이 피는 봄을 맞이하여 근친 나들이를 하였다.

 조선 순조(純祖)시대에 김매순(金邁淳)이 지은 열량세시기에 삼짇날의 시제사(時祭祀)부분을 기록된 바 있다. 나라 풍속에 기제사(忌祭祀)는 중하게 여겼지만 시제사는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왕조 중엽에 이르러 어진 선비가 배출되고 사대부중에 예(禮)를 숭상하는 자가 많아져 비로소 시제사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었다. 하지만 많은 백성은 대체로 가난하고 검약(儉略)해서 사계절의 시제를 모두 행하지 않고, 봄·가을 두 번 행하는데 봄은 삼짇날에, 가을은 중양절에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

  동국세시기에 의하면 시절 음식으로 두견화 술이 있으며, 진달래꽃을 따다가 찹쌀가루에 반죽하여 떡을 만들고, 그것을 화전(花煎)이라고 하였다. 또한 쑥떡·산 떡·고리 떡·화면, 등 여러 가지 음식을 장만하여 산과 물 좋은 곳을 찾아 나들이를 가는 것을 화전놀이 또는 꽃달임이라 하여 하루를 즐기는 풍습이었다.

  이렇듯 삼짇날은 우리 조상이 바쁜 일손을 잠시 접어두고 마음껏 봄의 정취를 즐겼던 명절이었다.

수필가 고재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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