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문제다
사람이 문제다
  • 이동희
  • 승인 2016.03.31 2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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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맹인이 캄캄한 밤에 등불을 들고 길을 걷고 있었다. 이에 지나가던 행인이 참 답답하고 멍청한 맹인이라며 이렇게 물었다. “당신은 불빛이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일 텐데 어찌하여 등불을 켜고 다니시나요?” 그러자 맹인이 답했다. “나를 위해 켜는 것이 아니라, 눈뜬 이가 나를 보지 못할까봐, 그들을 위하여 불을 밝힌 것이오.” 이 우화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짐작이 간다. 그러나 그 뜻을 정확히 안다 할지라도 타인[눈뜬 사람]을 위하여 등불을 밝힌 자아[맹인]의 행실은 어리석다고 지청구 당하기 일쑤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자식을 위하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부모가 늙고 병들어 보잘 것 없이 쇠락한 뒤에도 부모를 존중하는 자식을 찾기란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평생을 자식들 뒷바라지하다가 이제는 가진 것 다 소진하고 쇠약한 육신마저 지탱할 수 없게 된 부모는 천덕꾸러기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저 거추장스럽고 볼썽사나운 짐 덩어리일 뿐이다. 그저 어서 갈 길 가기를 바라기 십상이다. 유기체의 처참한 운명이다.

이와는 경우가 다른 부모-자식도 있다. 여린 자식들을 건사하지 못하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혹은 질곡의 세파 속에서 핏덩이 자식을 두고 이승을 먼저 하직한 부모도 있기 마련이다. 심지어 어린 아이들을 해외에 입양시키고 나 몰라라 하는 부모도 적지 않다. 아직도 우리나라가 해외입양에서 전 세계적으로 최대 어린이 수출국이라는 오명을 벗지 못하고 있다. 그래도 고아로 자라다시피 성장한 아이들이 후일 자신의 부모를 원망하기보다는 오히려 “오죽했으면 그랬겠느냐?”며 오히려 이해하고 동정하는 경우도 적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참으로 오묘한 부모-자식관계가 아니겠는가?

일본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고 한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해 줄 수 있는 최대의 교훈은 ‘자식보다 먼저 죽어주는 것’이다.” 이 험악한 세파를 견디고 한 유기체로서 개체를 유지하려면 강인한 자립정신이 없어서는 지탱할 수 없다. 그 누구에게도 지탱할 수 없는 혈혈단신인 자신을 돌아볼 때-적자생존(適者生存)의 자연법칙과 약육강식(弱肉强食)하는 밀림의 법칙을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데 부모의 어설픈 도움은 오히려 방해가 된다는 논리다. 냉혹하게 보이고 들릴지 모르지만, 생물체로서 그 존재성을 부정할 수 없는 인간의 숙명이 아니겠는가!

요즈음 자기 자식을 죽이고 부모를 살상하는, 존비속을 해하는 사건이 연달아 일어나고 있다. 듣고 보기에 민망할 정도로 우리 사회의 중심이 무너진 느낌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나 돌발적이고 끔찍한 강력 사건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이렇게 극심하게 천륜이 무너진 적은 없었던 것 같다. 동족상잔의 처참한 전쟁을 겪었을 때에도, 나라의 경제체제가 무너져 IMF의 구제 금융을 받았을 때에도 이러지는 않았다.

마침 UN자문기구 <지속가능발전해법네크워크-SDSN>에서 발표한 ‘세계행복보고서 2016’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행복지수가 157개국 중에서 작년 47위에서 58위로 열한 계단이나 추락했다고 발표했다. 그도 그럴 것이 행복지수를 결정짓는 ‘여섯 가지 요인’을 살펴보니 우리에게는 모두가 너무도 먼 나라 이야기로 들린다. 1인당 국민총생산(GDP), 기대수명 중 건강하게 사는 기간, 사회적 도움, 신뢰(정부와 기업의 부패), 인생 선택에서의 자유, 관대성(기부) 등등 우리 사회가 한결같이 외면하고 멀리해온 요소들이 행복을 좌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고도 어떻게 행복한 국민, 잘 사는 나라를 만들 수 있겠는가?

이는 모두가 사람의 문제다. 모든 국민을 상대로 굳게 약속한 선거공약을 헌신짝처럼 버리고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그것을 따지는 국민을 겁박하는 정치인, 그런 정치인들을 아무런 검증 없이 무조건 선호하는 우리들의 잘못된 의식이 패륜적이고 천륜이 무너진 오늘의 우리 사회를 만든 것이 아닌가, 심각하게 살펴봐야 할 것이다.

마침 선거철이 본격화되었다. 이럴 때 이런 사람-이런 정치 지망생은 없는지 면밀히 따져봐야 한다. “긴 밍크코트를 입은/ 사슴가죽 바지를 입은/ 악어가죽 부츠를 신은/ 너구리꼬리 장식이 달린/ 비버 가죽 모자를 쓴/ 저 여자가 뭐라고 그랬는지 알아?/ 고래를 구합시다.”(셸리 실버스타인의 詩에서) 자신을 위해, 자신만의 지역사회를 위해, 자신의 속한 패거리를 위해 등불을 드는 청맹과니가 아니라, 눈뜬 사람을 위해 등불을 드는 사람을 골라야 한다. 문제는 사람이다!

이동희<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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