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 대지의 숨결과 소리
봄날 대지의 숨결과 소리
  • 이귀재
  • 승인 2016.03.29 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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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부터 동료 교수와 함께 자전거 타기를 시작했다. 오늘 새벽에도 자전거를 타고 들판 길을 달리니 봄날의 바람이 싱그럽다. 앞뒤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얼굴을 부딪치고 다시 손끝으로 갈라진다. 따뜻한 봄기운이 바람을 따라 나를 감싼다. “갈 길이 멀고 낯설지만 바람은 늘 나를 설레게 한다”는 말이 다시금 실감 난다.

 야산의 들녘과 밭에는 푸르른 잡초들 틈새로 어린 쑥들이 보일 듯 말 듯 지천에 널려 있다. 향긋한 쑥 내음이 코를 간지럽힌다. 생명의 소리와 기운이 봄날 대지 위에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다. 봄의 소리가 들린다. 봄날에 대지의 생명이 뿜어내는 향기와 소리는 식물호르몬(식물이 분비하는 모든 물질 통칭)이 분비되는 현상이라고 봐야겠다. 시를 전공하는 어느 교수님은 봄이 되면 꽃가루가 날리기도 전에 호르몬 때문에 심하게 재채기하고 콧물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린다고 한다. 시인은 우리보다 더 예민하고 감수성이 풍부하기 때문일까.

 조금은 쑥스럽지만, 생명공학을 전공하는 나 역시 호르몬의 냄새에 언제나 민감하다. 솔직히 고추에서 풍기는 호르몬을 맡으면 병이 걸렸는지를 인지하곤 한다. 온실에 들어가면 수많은 종류의 작물들이 즐비하게 자라고 있지만 대략 냄새만으로도, 아니 식물이 호소하는 호르몬의 언어를 99% 정도는 이해할 수가 있다. 지난 시절 혹독한 훈련과 공부가 호르몬을 언어로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줬는지 모른다.

 지난 세월동안 마음으로 사사(師事)하는 두 사람의 생명공학자가 있다. 한 사람은 가난해서 고등학교도 못 다니고 유전 원리에 대한 과학적 지식도 없었던 미국의 루터 버뱅크(Luther Burbank)라는 육종학자이다. 그는 언제나 남루한 모습으로 땅에 엎드려 대지의 소리를 듣기로도 유명하다. 버뱅크는 식물과 대화하고 감정을 서로 섞었다. 가시 없는 선인장을 만들었던 에피소드는 유명하다. 버뱅크는 매일같이 선인장에 물을 주면서 “나는 절대 너를 해치지 않을 것이고, 다른 누구도 너를 해치지 못하도록 보호해줄 것이다. 그러니 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가시를 키울 필요가 없다”고 다정히 말을 건넸다.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선인장을 어느 사이엔가 가시 없는 새로운 품종으로 바뀌어 있었다.

 또 한 사람이 있다. 별명이 땅콩박사인 조지 워싱턴 카버(G.W.Carver)는 너무도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흑인 노예를 부모로 둔 탓에 인종차별로 고통받고 힘들게 공부하였지만, 지금은 미국인이 가장 존경하는 농학자로 손꼽힌다. 당시 미국의 남부지방은 오랜 목화재배로 땅이 척박해져서 더 이상 어떤 농사도 지을 수가 없었다. 카버는 농민들에게 땅콩재배를 권했다. 땅콩은 풍작이 들고 지력도 되살아났다. 그런데 땅콩이 너무 많이 생산되어서 가격이 폭락하고 농민들은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카버는 고민에 빠져 하나님에게 물었다. 하나님의 응답은 이랬다. “땅콩을 가지고 실험실로 들어가거라!” 그는 실험실에서 온갖 연구 끝에 땅콩버터를 비롯한 여러 가지 땅콩 가공품을 만든다. 나중에는 목화를 대신하는 고구마와 콩 등의 대체작물로 잉크, 플라스틱, 페인트, 물감 등 현대인의 필수품을 만들었다. 물론 발명에 대한 로얄티는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버뱅크와 카버에게 공통된 한 가지가 있다. 버뱅크가 대지와 식물의 소리를 들었다면, 카버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대지의 음성을 듣는 사람은 하늘의 소리도 얻는다. 이 두 사람에게는 한참도 못 미치지만 나에게 페르몬의 언어를 익혀준 지도교수가 있다. 매일같이 밤새워 공부하고 실험하라고 다그치고 잘못이라도 하면 운동장을 구보시킨 스승님이다. 올여름에 정년하는 지도교수의 퇴임을 준비하는 봄날이기도 하다.

 아침 자전거에 햇살이 부딪히고 봄바람이 상큼하다. 역사 속에서 위대한 사람들의 페르몬 향기까지 맡는 오늘 아침은 생명으로 온몸이 충만하다.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이귀재<전북대학교 생명공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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