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동학혁명 유적지, 자녀와 역사 문화 탐방
정읍 동학혁명 유적지, 자녀와 역사 문화 탐방
  • 정읍=강민철 기자
  • 승인 2016.02.18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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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이 곧 하늘이다”

 늦겨울 쌀쌀한 바람과 추위에 자녀들과 함께 역사와 근대문화 탐방을 통해 역사공부도 같이 겸해 볼 만 한 곳 정읍동학혁명 유적지권역으로 문화탐방을 떠나자.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괭이들고 호미들던 순한 손들이 두 주먹 불끈 쥐고 죽창을 세웨 제폭구민 척양척왜 목소리 높여 사람 사는 평등한 세상을 외치던 때가 있었다.

사람이 곧 하늘이며 모드가 평등한 세상, 120여년 전에 동학농민혁명군이 꿈꾸던 세상 바로 정읍 황토현권역을 둘러 보자.

봄 방학이 끝나기 전에 자녀들과 함께 구석구석 자연의 풍경과 향기를 머금고 전통문화와 역사를 체험할 수 있는 정읍 황토현권역 역사를 찾아 여행을 나서자.

먼저 동학혁명 모의탑에 들려 주변 사발통문 작성집,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에 방문해 동학혁명이 발생한 상황과 혁명으로 죽어간 농민들 위로하자. 이어, 영원면에 위치한 전봉준 장군 고택, 전봉준 장군 단소와 혁명군이 모인 말목장터, 동학혁명의 시발점인 만석보유지, 최초의 황토현전투 전적지에 세워진 동학농민혁명기념관(황토현전적지, 갑오동학혁명기념탑)에서 각양각색의 전시된 유물을 감상하고 역사를 되돌아 볼수 있다.

▲고부면 신중리 주산마을에 서있는 동학혁명모의탑은 동학농민혁명이 사전에 준비되었음을 밝혀주는 학술적 가치가 큰 곳으로 사발모양의 원모양을 따라 봉기의 주모자 이름을 적어 넣은 사발통문을 작성한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 1969년에 세워진 동학혁명모의탑이 서있으며, 마을안에 사발통문작성지와 무명동학농민국위령탑이 있다. 

▲송두호의 집에서 작성한 사발통문 결의문은 주동자를 밝히지 않기 위해 20명의 이름을 둥글게 적었다. 사발통문에는 4가지의 거사계획이 기록되어 있다.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은 고부면 신중리 주산 녹두회관 앞에 1994년 세워졌다.

 동학농민혁명으로 죽어 간 수십만에 달하는 혁명군들은 역적으로 몰려 시신도 제대로 수습할 수 없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혁명에 앞장섰던 사람들의 남은 가족들도 신분을 숨기고 역사 속에 조용히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다.

 그들의 가슴에 깊이 맺힌 한과 응어리가 혁명이 끝난 지 100년 만에 비로소 무명동학농민군이라는 이름으로 위안을 받았다.

위령탑은 높이 5m의 주탑과 23개의 보조탑으로 이뤄졌다. 주탑은 죽어가는 동료를 품에 안고 절규하는 죽창을 든 동학농민군의 모습이 형상화 되어 절로 숙연해 진다.

▲갑오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이 살았던 곳인 이평면 조소리에 초가삼간집이 있다.

동쪽으로부터 부엌, 큰방, 윗방, 끝방이 나란히 달린집으로 남부지방 일반 민가의 구조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국가지정문화제 사적 제293호로 지정하여 보존되고 있다.

전봉준은 1855년(철종6) 전북 고창에서 출생해 정읍 이평, 산외 등에서 살았다. 녹두장군이라는 별칭으로 잘 알려져 있다. 1894년 손화중, 김개남, 최경선 등과 함께 동학농민혁명을 일으켜 무너져가는 나라를 바로잡고 일본의 침략에 맞서 자주국가 건설을 주장했다. 동학농민혁명이 실패로 끝난 뒤 순창에서 재기를 노리던 중 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된 뒤 1895년 교수형을 당했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갑오년 정월 초순 매서운 찬바람이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한 겨울 밤, 흰옷을 입은 수 천여명의 농민군이 말목장터에 모여 들었다. 군중 한쪽에서는 신명나는 풍물굿판이 펼쳐졌다. 모인군중들의 손에는 제각기 낫이며 쇠스랑 죽창 등이 들려 있었다.

성난 군중들 앞에서 작달막한 한 사내가 우렁찬 포효를 내뿜었다. 그의 얼굴에는 비장함이 가득했다.

“오늘 우리는 악랄한 탐관오리 조병갑을 혼내주기 위해 이자리에 모였습니다. 나라는 외세의 등쌀에 백척간두인데 무능한 간신배들은 제 뱃속 채우기에 정신이 없고 지방의 탐관오리들은 백성들을 쥐어짜기만 할 뿐입니다. 우리모두 하나가 되어 탐관오리 조병갑을 몰아내고 나라를 반듯하게 세워 농민이 주인이 되는 진정한 세상을 만듭시다”

120여년 전 성난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 동학농민혁명이 발생한 배경이다.

1894년(고종31)고부군수 조병갑의 압정으로 발생한 고부 농민봉기는 전봉준과 손화중을 중심으로 제폭구민과 보국안민의 가치를 든 동학혁명으로 확산되었다. 그러나, 이 혁명은 일본군의 간섭으로 공주싸움에서 패배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가까이 다가서면 어디선가 그때 그 외침과 서러움이 몰려들 것 같은 만석보유지비(이평면 하송리 699)는 1892년 5월 고부군수로 부임한 조병갑이 농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기존 보가 있음에도 신보(만석보)를 막아 보세의 명목으로 농민을 수탈하여 배들평야 농민들의 분노를 야기시켰으며 1894년 정월에 전봉준을 선두로 한 농민들이 만석보를 때려 부숨으로써 갑오동학농민혁명의 빌원지가 된 곳이다.

신태인에서 이평으로 가는 약 4km 지점, 정읍천과 태인천을 건너는 다리 아래 보를 쌓은 흔적이 있다. 여기가 한국사에 일대 변혁을 가져온 동학농민혁명의 발원지 만석보터다. 이터에 당시 동학농민의 울부짖음을 담아 1973년 5월 11일에 2,5m의 만석보유지비를 건립했다.

▲말목장터(이평면 두지리)는 동학농민혁명의 첫 시발점으로 1894년 1월 10일밤 동학농민군이 예동마을에 최초로 집결하여 고부관아로 진격한 곳으로 고부 점렴후 농민군지지가 되었다.

▲황토현 전적지(덕천면 동학로 742)는 농민군이 관군을 상대로 처음으로 대승을 거둔 전적지로 사적 제295호로 지정됐다. 기념탑 아래에는 전봉준장군 동상과 함께 동학동민혁명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동학농민군이 전주 관군을 맞아 최초로 싸운 곳은 시뻘건 황토 흙이 온통 산을 뒤덮고 있는 황토언덕(황토현)이다.

농민군을 우습게 알고 별 준비없이 진격하던 5백여명의 관군과 1백여명의 보부상들은 매복해 있던 동학농민군에게 대패했다.

 황토현 전투는 동학농민혁명사에서 가장 큰 성과이며 의미있는 출발점이다. 관군에게 대승을 거둔 이들은 그 기세를 몰아 정읍, 흥덕, 고창, 무장 등을 점령하였으며 흥계훈이 이끄는 정부군을 장성 황룡천에서 격파한 후 전주성까지 입성하는 개가를 이루었다.

▲그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동학농민혁명의 성지나 다름없는 황토현에 1963년 갑오동학혁명기념탑이 세워졌다.

 이 이전에는 동학난이라 치부하며 역적으로 몰아붙였던 동학농민군들을 기념탑이 세워지며 동학농민혁명이라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

이어, 황토현 전적지 앞에 건립된 전라북도동학농민혁명 기념관(덕천면 동학로 742)은 총 5천489.6㎡(전시관 및 교육관 등 4동)으로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 관람이 가능하고 매주 월요일은 휴무이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기념관에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사발통문, 양호전기, 흥선대원군효문 등을 포함해 5천401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또, 녹두학당은 총면적 139㎡(42평)에 어린이 수준에 맞는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도서를 비롯한 일반인 대상 자료를 구비하고, 편안한 휴게공간도 마련해 어린이와 학부모가 함께하는 작은도서관 기능을 하고있다.

녹두학당 이름은 동학농민혁명 당시 전봉준 장군이 서당의 훈장이었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것으로, 과거 백성들이 서당에서 배움을 얻었던 것과 같이 녹두학당을 통해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정신을 본받고자 기획해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번 여행을 통해 사람이 곧 하늘인 세상으로 조금더 다가가고, 힐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읍=강민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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