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황태자
마지막 황태자
  • 장상록
  • 승인 2016.01.27 1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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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쿠다 도쿠조(福田德三)는 러일전쟁 직전 한국을 여행한다. 경제학자였던 그는 이때 얻은 자료와 자신의 견문을 바탕으로 ‘한국의 경제조직과 경제단위’라는 논문을 발표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당시 한국의 사회 경제발전단계가 일본의 10세기경인 후지와라 시대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당시 한국의 경제 발전상태가 일본보다 천년 뒤져 있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주장은 마르크스(K. Marx)가 얘기한 역사발전 5단계론에 근거한다.

  근대사회의 성립을 위해서는 봉건제도의 존재가 필수적인데 한국사에는 봉건제가 결여됐기 때문에 근대로의 전환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대표적 식민사관인 ‘정체성론(停滯性論)’이다. 그럴듯해 보이는 후쿠다의 이 논리는 오랜 시간 한국 지성들에게도 논란의 대상이 된다.

 수많은 학자들이 한국사에서 봉건의 흔적을 좇았다. 일본만이 아니라 한국에도 봉건이 존재했고 근대의 맹아가 싹트고 있었다고 얘기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럼 한국에 봉건제가 존재했는가.

 프레임은 사고를 규정한다. 후쿠다가 얘기한 봉건제가 없어서 정말 한국사가 정체된 것 인가.

  만일 한국에 봉건제가 없어서 정말 문제라면 후쿠다의 논리를 반박하는 것이 쉽지 않다.

 이제 그것을 넘어 생각해보자. 과연 모든 인류역사가 마르크스가 얘기한 대로 진행돼야 하는가. 마르크스는 그것을 ‘아시아적 생산양식’이라 규정했지만, 서구의 역사진행 방식만이 유일한 지표라는 사고야말로 폭력적이고 야만적이다. 제국주의적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일 뿐이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후쿠다류의 사이비 논리가 강변한 그 문법에 충실했던 일본인이다.

  안중근(安重根)이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 했을 때 일본인 모두가 슬퍼한 것은 아니다. 또 하나, 의외로 이토의 최후를 부러워했던 일본인이 적잖았다. 놀라운 것은 가장 큰 충격을 받았던 인물은 영친왕(英親王) 이은(李垠)이었다. 국권을 침탈하고 자신을 볼모로 데려간 원흉의 죽음에 슬퍼한 황태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은 영친왕과 함께한 이토의 사진에 있다. 사진 속 이토는 어린 손자를 보살피는 인자한 할아버지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실제, 이토는 대한제국 황실과 황태자의 후견인이자 보호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가 영친왕에게 보여준 것이 ‘악어의 눈물’이었다 할지라도 어린 황태자가 분별하기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영친왕이 이토의 죽음에 슬퍼했던 것이야말로, 인질이 인질범에 동화되어 경찰을 증오하고 인질범을 옹호하게 되는 전형적인 ‘스톡홀름 증후군’이다.

  정신질환으로까지 얘기되는 이런 상황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누구나 암에 걸릴 수 있듯이. 영친왕이 느낀 개인적 슬픔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이 일로 민중은 더 이상 대한제국에 기대할 것이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땅의 민중에게 영친왕은 개인으로만 존재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친왕은 조선의 황태자가 아닌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 살아간다. 일본 육사를 나와 일본군 중장의 지위에 오른 조선의 황태자. 그가 부인 이방자(李方子)여사와 유럽여행을 떠나 골프를 치는 모습을 보면 너무도 행복한 일상이다. 그럼에도 그가 누린 소소한 기쁨들을 바라보는 조선민중의 맘까지 행복할 수는 없다. 다만, 어린 나이에 일본에 끌려가 철저히 일본화 교육을 받은 그가 평생 조국의 말을 잊지 않았다는 것은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그는 평생 감정표현을 절제하고 과묵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 그가 자신을 찾아온 조선의 공연단이 합창한 아리랑을 들으면서 아무런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고 한다.

 그럼에도 그의 삶이 동정을 받기엔 그가 짊어진 짐이 너무도 무거웠다.

 그는 조선의 황태자였고 높은 위상만큼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해방된 조국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망국의 황태자가 차지할 수 있는 영역은 없었다.

  그는 죽기 전 귀국했지만 아무런 의식도 없었다.

 장상록<예산군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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