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걀노른자를 넣은 모닝커피
달걀노른자를 넣은 모닝커피
  • 이문수
  • 승인 2016.01.25 16: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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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실에 대한 불만과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아프고 힘들었지만 지난 시간 속 추억을 끌어올리는 것은 인기를 끈다. 그래서 최근 종영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이 세간에 회자하면서 많은 사람에게 편안함과 위로를 주었나 보다. 평소에 TV를 즐기지 않는 필자는 그 드라마 마지막 즈음에 한 편을 보았다. 감각적인 말솜씨를 가진 스포일러(spoiler) 막둥이의 설명을 들으면서 봤기 때문에 대충 줄거리는 알 수 있었다. 내용을 함축한 논문 초록을 탐독한 느낌으로.

 필자는 85학번이다. 몇 학번이라는 표현이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에게 위화감을 줄 수도 있어서 즐겨 쓰지 않지만, 85학번이다. 베이비 붐 세대 끝자락에서 혹독한 경쟁을 해야만 하는 세대. 가수 이문세의 ‘광화문 연가’가 감미롭게 감성을 자극하면, 암울한 현실을 마취시키고 봉합해 버리는 것 같아 애써 고개를 돌렸다. 왜냐면 이세종 열사를 추모하기 위해 ‘다시 살아 하늘을 보고 싶다’는 문구를 새긴 비석도 제자리를 못 잡던 시절. 한편으로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과 걸어 보지 않았고, 아직 남아 있을지 모르는 정동길 옆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도 본 적이 없어서 그랬을 것이다. 낭만에 취하기에는 어둠이 짙었고 추웠다.

 1982년, 전북예술회관이 문 열었다. 당시 준공에 부족한 돈을 마련하기 위해 1975년 12월에는 서울국립공보관에서 ‘한국원로중진작가미술전’을 개최했다. 중앙 집중적인 문화예술 풍토를 지양하고 지역 균형 발전에 뜻을 같이한 전북 미술가 외에도 김은호, 이마동, 장욱진, 서세옥, 허백련, 박영선 등이 출품했다는 기록이 있다. 올해는 그곳에 전북문화관광재단이 출범해서 둥지를 틀고 있는 걸 보면 전북예술의 산실이자 명당이라는 생각이 든다.

 전북예술회관 이전에는 다방이 미술전을 위한 대안공간이었다. 다방 마담이 달걀노른자를 넣은 모닝커피와 함께 미술품 거래를 위해 중개인 역할을 하던 시절이 오히려 작품이 팔렸던 시절이었다고 회상하는 원로 미술가도 있다. 마담이 지금의 큐레이터보다 더 능력이 있었다는 얘기다. 여담 같지만, 1973년에는 전라북도 도청 직원의 휴식 공간으로 애용하던 다방이 전시회로 인해서 혼잡해 지자 도 당국은 다방 전시 금지령을 내렸다고 한다. 지금 시각에서는 촌극이다.

 그곳에 가면 항상 화단의 선생님과 선배를 만나 인생과 예술에 대해 귀동냥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항상 목말라 있었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쯤은 서울 인사동과 혜화동을 찾았다. 잘 정돈된 갤러리 안에 완성도 높은 세련된 작품들. 거기에 더해 입구에 비치된 도록도 도톰하고 뭔가 있어 보였다. 주머니 가벼운 시절이라 유료면 펼쳐서 눈요기만 하고 무료면 무조건 챙겨왔다. 마지막으로 교보문고에 들러 책 몇 권을 사면 옆구리 가방은 두툼해진다. 거대한 마천루가 있는 서울, 왠지 주눅이 들어 작아지고 피곤했다. 전주로 돌아오는 고속버스에 몸을 맡기면 마음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았다.

 그런 시간을 뒤로하면서 우리가 발 딛는 이곳에 우리만의 미술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새로운 눈이 열렸다. 전북은 백제의 융성한 문화와 기상이 뿌리내려 있고, 선사문화와 근현대문화가 오롯이 살아 있으며 멋과 흥취가 배어 있다. 이제 눈을 들어 자신감 있게 이 땅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요즈음 도립미술관에서는 ‘전북 모더니티 역사전’을 기획하고 있다. 전북 근현대 미술을 조심스럽게 맥락 지으려 한다. 실무적인 책임을 담당하고 있는 필자는 현장을 찾아 역사적인 작품을 대면하면서 안복을 누리고 있다. 이 전시를 계기로 소통하면서 건실한 담론이 만들어지길 기대해 본다.

 전북 모더니티 역사에서는 누가 무엇인가를 ‘첫 번째’로 시도했는가를 규명할 수도 없고, 규명할 필요도 없다. 확실한 것은 지금도 우리는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편견과 선입관 없이 소박하면서도 다양한 전북미술의 역사 한쪽을 즐기길 바란다.

 이문수<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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