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춘문예][소설 당선작] 서귀옥씨 ‘굿맨’
[신춘문예][소설 당선작] 서귀옥씨 ‘굿맨’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5.12.28 14:3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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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전히 가짜라니까…!

 아내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지만 단호하게 들렸다. 내가 출근준비를 하는 동안 아내는 전화기를 붙들고 베란다에 서 있었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아내와 눈이 딱 마주쳤다. 아내의 얼굴에 흠칫 놀라는 표정이 스쳐갔다. 문득 며칠 전부터 긴히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무시로 내 주변을 서성거리던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설마 이 사람이 눈치를…? 나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최근 내게 벌어진 일을 아내가 알게 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바깥출입은 물론이거니와 저렇게 누군가와 통화를 하는 것조차 낯설게 보이는 아내였다.

 아니면 이 사람이…? 나는 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내가 내 흉허물을 그런 식으로 늘어놓을 까닭도, 또 그럴 만한 흉허물이 내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그동안 아내와 살아오면서 크고 작은 기념일을 잊고 지나간 적이 거의 없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리모컨이나 물심부름 따위를 시켜서 아내를 짜증나게 하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여자문제라면 나만큼 떳떳한 사람도 없었다. 접대부가 있는 술집조차 의식적으로 피해왔으니 말이다. 그런 내게 무슨 재미로 사느냐고 묻는 이들도 더러 있지만 나는 매번 그 소리를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나중에 불필요한 오해를 받아서 골치를 썩이거나 뒷수습을 하느라 번거로울 것을 생각하면 오히려 그 편이 훨씬 경제적이고 합리적이었다.

 이봐, 다녀올게.

 식탁 위에 놓인 도시락 가방을 챙겨들고 나와 신발을 신으며 나는 베란다 쪽을 향해 소리쳤다. 기척이 없었다. 집을 나와 엘리베이터 앞에 섰을 때 집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쇳소리가 계단을 울렸다.

 

 멀리 리어카를 끌고 가는 정 노인이 보였다. 출근시간에 맞춰 집을 나오긴 했지만 서둘러야 할 이유도, 마땅히 갈 곳도 없는 처지라 느긋하게 아파트 후문 쪽으로 빠져나오는 길이었다. 평일 아침 시간대에 이 길을 이용하는 건 처음이었다. 언젠가 이곳에서 노인을 본 이후로 퇴근길에 가끔 뒷길을 이용했을 뿐이다. 한사코 사양하는 노인과 국밥을 함께 먹었고, 장갑이며 귀마개, 모자 등을 사드리기도 했다. 박스 줍는 시간을 빼앗았다는 핑계로 헤어질 때는 몇 푼 안 되는 돈이나마 노인의 주머니에 찔러주곤 했다.

 어르신, 박스는 많이 모으셨어요?

 나는 차를 멈추고 창문을 내렸다. 텅 빈 리어카를 보고서야 아침 시간에 할 인사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아이고, 누구시라고…. 이제 출근하세요? 나는 방금 나왔어요. 이제부터 시작해야지요. 아휴, 추운데 얼른 문 닫으세요.

 재윤이는요?

 선생님도 참… 그 놈은 지금 학교에 있을 시간인데요.

 아하, 그렇지요.

 노인은 누런 이를 보이며 웃었다. 혼자 폐박스를 줍던 노인 옆에 열 살 남짓한 사내아이가 보인 건 노인을 너 댓 번 만난 후였다. 손자인 재윤이었다. 재윤이는 다리를 절었다. 성치 않은 몸으로 할아버지를 돕겠다고 따라나선 것이었다. 그때부터 나와 노인과 재윤이는 국밥집과 중국집을 번갈아 오가며 저녁을 먹곤 했다. 로봇 장난감을 받고 뒤뚱거리며 좋아하는 재윤이를 보는 것은 내게도 기쁨이었다. 그들은 내가 원해서 무언가를 하는 일의 즐거움이 어떤 것인지 알게 해주었다.

 내가 무언가를 할 때는 누군가 내게 부탁을 했거나, 비록 부탁은 아니더라도 간절한 눈빛을 보냈을 때뿐이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 어려운 일에서 벗어난다면 그건 분명 기쁜 일이다. 나 역시 기쁜 건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내겐 다른 성격의 기쁨이었다. 누군가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그래서 내가 편해졌다는 그런 홀가분함 같은 것이었다.

 시청까지는 큰길이 빠른데요. 이 길은 빙 돌아가야 되고….

 오늘은 시간이 좀 있어서요. 아, 잠깐만요.

 나는 노인에게 도시락을 내밀었다. 아내는 점심 도시락만큼은 꼭 챙겼다. 아내의 꼼수라면 꼼수였다. 누구와 언제, 어디서 식사를 하던 계산을 하지 않고 나오질 못하는 내 성격을 알게 된 후부터였으니 말이다. 아내는 현관에서 내가 구두를 신을 때까지 도시락을 들고 기다려주곤 했다. 며칠 전부터 식탁 위에 올려놓는 것으로 끝나긴 했지만 아내는 여전히 정성껏 도시락을 준비했다. 오늘은 도시락을 챙기면서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더 이상 숨기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싶어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털어놓자 마음먹고 집을 나선 참이었다.

 이 귀한 도시락을 왜 나한테 주세요?

 오늘은 점심 약속이 있어요. 이거 안 먹고 가면 집사람한테 혼나거든요. 나중에 만나면 그때 빈 통은 주시면 돼요. 그럼 저는 가볼게요.

 내가 인사를 하자 노인은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숙였다. 심란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경호주무관은 나를 보자 꾸벅 인사를 했다. 혼자 점심을 먹기도 멋쩍었지만 그와 밥 한 끼를 하자고 내내 생각해오던 터였다.

 잘 지내는가?

 말도 마십시오. 눈만 뜨면 민원에, 신고 전화에 죽을 지경입니다. 자리를 통 비울 수가 없다니까요.

 우경호의 그 말은 마치 못 나올 걸 억지로 나왔다는 말처럼 들렸다. 나라고 왜 모르겠는가.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함께 겪던 일이 아닌가. 최근 도심 곳곳에서 발생한 대형 싱크 홀의 여파로 우리 시 홈페이지에도 민원이 폭주했고, 쥐구멍만 봐도 호들갑들을 떨어대는 실정이었다. 도로건설사업소 도로과 직원인 우리는 거의 비상상태였다. 지반침하 원인이 다양해서 관련부서 가 모두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도 사실이지만 일단 신고가 들어오면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해야 하는 건 언제나 도로과 직원이어야 했다. 조금만 늦어도 늦장대응이라느니 직무유기라느니 말들이 많았다. 거기다가 얼마 전 우리 시에서 발생한 싱크 홀과 관련된 사고 때문에 그 파장은 더욱 커졌고, 그로 인하여 포트 홀 신고도 부쩍 늘었다.

 그나저나 사직처리가 순식간에 이루어져서 제대로 인사도 못 드리고… 죄송합니다. 저 뿐이 아니라 다른 직원들도 모두 섭섭해 하고 있어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부서에서 과장님께 신세 한 번 안 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우경호의 말처럼 사직서는 제출하자마자 신속하게 처리되었다. 사안이 사안인 만큼 더 시간 끌어 좋을 것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빠르게 마무리된 것도 사실이었다. 어차피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만 했고, 불똥이 튀어 문책이라도 당할까 노심초사하던 소장이나 윗선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서는 내가 달갑기도 했을 것이다.

 사고가 발생한 것은 3주 전, G병원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도로와 인도의 경계 부근이었다. 폭 1미터, 깊이 약 1미터 50센티미터의 지반침하가 생겼다는 신고가 들어온 것은 밤 10시경이었다. 그날 3명의 당직자 중 우리부서 직원 박영민이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기일이어서 내가 두 시간 거리의 고향집에 있던 시간이었다.

 내게 전화를 건 박영민은 포트 홀이라고 보고했다. 포트 홀이라고는 해도 인도 쪽이라 나는 곧바로 내려갈 채비를 서둘렀다. 그 사이 박영민에게는 다른 직원들과 연락을 취하고 현장이 가까우니 먼저 가 있으라고 지시했다. 야광펜스를 쳐서 안전에 만전을 기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러나 박영민은 저 혼자 나가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직원들과 연락을 취하지 않았고, 더군다나 현장으로 가는 길에 어머니가 쓰러졌다는 연락을 받고 그 길로 방향을 돌렸던 것이다. 박영민이 그 상황을 가볍게 생각한 것은 신고자로부터 신고를 받을 때 깊이가 15센티미터인 걸로 잘못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대형사고가 터졌다. 인도를 지나던 구순의 노인이 구덩이 빠져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 것이었다. 신고를 받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무능한 처사에 대한 비난이 빗발쳤다. 홈페이지는 마비되었고, 당직자를 자르라는 현수막이 붙기 시작했다.

 박영민은 내 바짓가랑이를 잡고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박영민은 결혼도 하지 않고 홀 노모를 모시고 사는 처지였다. 요즘 청년들을 일컫는 3포 세대니 5포 세대니 하는 말을 박영민에게 들은 적 있던 나로서는 난감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한 박영민의 앞날을 생각하니 내가 더 캄캄해졌다. 나는 5년 후면 퇴직할 몸이었다. 3포나 5포를 경험하게 될 자식도 없었다. 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그 모든 일은 다음날 날이 밝는 대로 출동하라는 내 지시에 따른 것으로 뒤집어졌고, 책임은 당연히 내가 지는 것으로 하였다. 또한 그 일은 나와 박영민, 그리고 소장만 아는 것으로 하고 덮었다.

 저기…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과장님이 박영민에게 그런 지시를 내렸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혹시 박영민 대신 총대를 메신 건 아닙니까?

 다 끝난 일 아닌가. 그 얘긴 그만하지.

 그러니까 제 말은… 과장님이 원체 다른 사람 어려운 거 못 보니까… 혹시 박영민이 과장님 바짓가랑이를 잡고 살려달라고 애걸복걸 한 건 아닌가 하고요. 솔직히 과장님이야 누가 심장을 빌려달라고 해도 당장 꺼내줄 분이 아닙니까.

 어허, 그만하라니까.

 내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우경호는 멋쩍었는지 뼈 해장국 국물을 후후 소리 나게 불어가며 들이마셨다.

 저는 다만… 과장님께 죄송해서….

 그 순간 나는 우경호를 만나러 온 걸 후회했다. 어쩌면 내가 만나자는 것을 우경호는 오해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1년 전 우경호는 주택을 구입하면서 공무원대출한도가 넘는 부분에 대하여 연대보증을 부탁한 바 있다. 그때 이미 나는 친구들에게 여러 차례 보증을 선 일로 낭패를 당한 터라 그것만은 피하자는 심정으로 차라리 가진 돈을 빌려주기로 하였다. 아내를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웬만해선 나를 거역하지 않는 아내였지만 그때만큼은 완강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손댈 수 없다며 정기예탁해둔 아들 준이의 사망보험금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날 아내로부터, 당신이란 사람 포기했으니 앞으로 당신 맘대로 하고 살아요, 라는 말을 기어이 듣고 말았다.

 내가 사직한 상황이니 우경호 입장에서는 빚 독촉이라도 당할까 두려웠을 것이고, 비위라도 맞출 요량으로 내심 내 걱정을 하는 것일 터였다.

 여기저기서 땅바닥이 푹푹 꺼지니, 원… 이러다간 지구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그라드는 거 아닌지 몰라. 언젠가 집 안에서도 홀이 생겼다는 뉴스가 있었지, 아마…?

 나는 무안했을 우경호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말했다.

 미국 플로리다 주입니다.

 우경호는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사람처럼 명료하게 말했다. 대화를 끌어가자는 의도 같은 건 전혀 없는 말투였다.

 자던 채로 침대와 함께 푹…! 어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 아닌가? 그러니까 자네도 너무 아등바등하지 말게.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게 사람 운명이거든…. 내일이라도 자네 발밑이 안 꺼진다고 누가 장담하겠어, 안 그런가? 자네 어깨에 얹힌 짐이 많은 것 같아 하는 말일세. 장남이라고 기대고 의지하는 가족도 알고 보면 사람 좋은 자네를 믿어서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조급해하지 말고 마음 편하게 가지라는 말이야.

 사실 그 말은 우경호를 위로하려는 것이었다. 몇 달 전 내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우경호가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날 우경호는 1년 동안 단 한 번도 이자를 주지 못한 것부터 미안해했다. 부모님이며 동생들 모두 제 입만 바라본다면서 자신은 허울 좋은 공무원일 뿐이라고도 했다. 급기야는 이렇게 살아 뭐하냐며 내 옷소매를 붙잡았다. 이자는 무슨 이자… 내 입에서 그 말이 나오고 나서야 우경호는 눈물을 닦았다.

 요즘은 착하게 살아도 좋은 소리 못 들어요. 오히려 손해 보는 세상이라니까요.

 생각보다 말이 빠른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우경호에게 그런 말을 듣고 보니 참기 어려웠다. 내가 남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것은 좋은 사람 소리를 듣자는 것도 아니고, 내 여건이 나아서도 아니다. 다만 내가 거절했을 때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걸 감당하지 못해서일 뿐이다. 그 때문에 누군가는 나를 굿맨이라 불렀고, 특히 전기장판이며 보험이며 자동차 같은 것으로 나를 거쳐 간 친구들은, 굿, 구웃…!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그 중에는 나를 어리바리한 숙맥 정도로 취급하는 사람도 있다. 나라고 왜 모르겠는가. 다만 면전에서, 그것도 우경호에게 그 말을 듣고 보니 심한 모욕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우경호의 전화가 울렸다.

 또 포트 홀이랍니다. 앞으로는 밖에서 식사하는 것도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가 숟가락을 놓자 기다렸다는 듯 무섭게 일어서며 우경호는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그런 식으로 못 박았다.

 네, 도로과 양진섭입니다.

 우경호와 헤어져 차에 오르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나는 입에 붙은 말을 내뱉다가 조금 머쓱해졌다.

 하이고, 놀래라. 내가 전화를 잘못 걸었나 했지 뭐냐. 아,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는 거냐. 니 처가 혹시 나 왔더라고 전화를 안 했든?

 어머니였다. 어머니의 말에는 단단히 심지가 박혀 있었다.

 아, 예…. 전화라도 하고 오시지 않고요. 퇴근하면 곧장 집으로 들어갈 테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어쩌면 잘된 일이었다. 어머니와 아내 앞에서 실직을 말하는 편이 수고를 더는 일이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럴 것 없다. 지금 집으로 내려가는 중이다. 좀 전에 버스를 탔어.

 네? 왜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왜요는 무슨… 내가 뭣 땜에 도로 내려가겠냐. 니 처한테 문전박대를 당했으니 도리가 없는 일이지. 참 내, 기가 막혀서 원….

 좀 차근차근 말씀하세요.

 니 처가 나를 아예 집에 들이지도 않았으니 하는 말이지. 걔가 이제는 시에미도 모른 척하더라. 내가 너 사는 집에 뭘 얻어먹자고 갔겠냐? 아, 이게 다 니가 잘못해서 그런 거지 뭐냐. 니가 준이만 잘 지켰어도…. 아니다. 아무리 아범이 잘못해도 그렇지, 어떻게 나를 문전박대를 하느냐 말이야.

 아, 예….

 에비 너도 그렇다. 무슨 죽을죄를 졌다고 아직도 마누라 눈치보고 사는 거냐. 듣자니까 요즘 이혼은 흉도 아니라더라. 아무튼 내 다시는 너희 집에 발걸음을 안 할 테니, 그리 알아라.

 하이고, 우리 최순임 여사께서 어찌 이렇게 골이 나셨을까요? 집사람이 왜 우리 순임 씨를 문전박대하겠어요. 혹시 집을 제대로 찾은 건 맞아요?

 너 지금 나를 치매 걸린 노인네 취급하는 거냐? 이래봬도 나 아직 멀쩡하다. 그보다 저기… 아무래도 나는 걔가 좀 이상한 것 같더라. 꼭 굿에 들어간 사람처럼….

 굿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전화기를 떨어뜨릴 뻔했다. 누군가 나를 향해 굿, 구웃! 하며 엄지손가락을 쳐들고 빈정거리는 것만 같았다.

 구 굿이라니요?

 왜 있잖니. 너는 기억 안 나냐? 아, 거 왜, 옛날에 이장 영감 묏자리 파놓은 데서 미친 년… 아니, 광조 엄마가 거기 기어들어가서 죽은 거, 벌써 잊었어?

 그런 일이 있었다. 그걸 처음 발견한 사람은 나였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내가 술에 취한 아버지를 다리 밑으로 밀어버린 날이기도 해서 금방 그 일이 떠올랐다. 이유야 어떻든 아버지가 버둥거리는 모습을 보자 덜컥 겁이 났고, 그 길로 뒷산으로 도망가던 길이었다.

 그 묏자리는 이장 어른이 급사하자 자식들이 선산에 서둘러 마련한 것이었다. 그 구덩이 속에 광조 엄마가 누워 있었다. 나는 한달음에 산을 내려와 어른들에게 알렸다. 그 광경을 직접 확인한 동네 어른들도 한동안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결국 그 묏자리는 이장 어른이 아닌 광조 엄마의 무덤이 되고 말았다. 동네 할머니 한 분은 남의 굿을 훔친 도둑년이라고 목울대를 세웠다. 무당굿도 아니고 굿모닝 굿도 아니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을 뿐, 내 기억에서 까마득하게 잊힌 말이었다.

 아, 글쎄 말이다, 니 처가 얼굴이 하얘져서는 나를 보는데, 영락없이 귀신같더라니까. 그래서 너 올 때까지 기다릴까 하다가 그냥 내려가는 것이다. 아무튼 들고 온 거니까 마늘이랑 나물은 문 밖에 뒀다. 얼른 니 처한테 전화해서 안으로 들여놓으라고 해라. 그리고 아까 내가 한 말 명심해라. 니 인생, 아직도 창창하다. 내 이만 끊으마.

 나는 곧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요? 아니, 안 오셨는데요.

 아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펄쩍 뛰는 소리를 했다.

 안 오셨다고? 거, 이상하네.

 가만… 아, 맞아요. 이제야 생각났어요. 어떤 여자가 우리 집에 오기는 했어요. 잡상인이었어요. 그런데 그 여자가 어머니 흉내를 어찌나 잘 내든지 하마터면 깜빡 속을 뻔했지 뭐예요. 그러잖아도 요즘 들어 부쩍 우리 집에 이상한 사람들이 찾아오곤 하는데….

 제법 움직였다고 생각했는데도 더 이상 갈 데도 할 일도 떠오르지 않았다. 퇴근시간이 두 시간이나 남았지만 나는 집 쪽으로 차를 몰았다. 아파트 뒷길로 접어들기 전에 편의점에 들러 소주와 마른안주를 샀다. 술의 힘이라도 빌려야 할 것만 같아서였다. 막 자동차에 오르려는데 골목 안에서 재윤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퉁이 쪽으로 다가가자 정 노인과 재윤이가 보였다. 노인은 전봇대에 기댄 채 담배를 피우고, 재윤이는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었다.

 이놈아, 안 춥냐? 얼른 먹고 이쪽으로 와.

 박스 팔러 안 가?

 이깟 것 갖다 줘 봐야 얼마나 된다고… 기껏 해봐야 이천 원이야.

 그래서 그 선생님을 기다리는 거야? 어제는 이 길로 안 지나갔잖아.

 혹시 또 모르니까 기다려보는 거지. 그 양반이 주는 돈… 이거 쌔가 빠지게 모아 봐야 어림도 없어. 그러니까 니가 잘해야 된단 말이야. 그 선생님한테 싹싹하게 굴고….

 할아버지가 하란 대로 하고 있잖아. 저번에 우리 반 아이를 만나서 내가 얼마나 쪽팔렸는지 알아, 알지도 못하면서….

 왜 몰라, 알아. 나라고 이게 뭐 좋아서 너를 시키겠냐.

 노인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알았어. 내가 잘 하면 되잖아. 참, 그 선생님 올 때는 안 됐어?

 아직 퇴근시간이 안 됐다.

 나는 그곳을 빠져나와 다시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소주와 안주를 간이 테이블 위에 펼쳐놓았다. 술이 쓰디썼다.

 하이고, 선생님 일찍 퇴근을 하셨네요.

 유리문 밖에서 나를 알아본 노인은 허리가 땅에 닿도록 인사를 했다. 재윤이도 꾸벅 인사를 했다. 나는 노인과 재윤이를 불러들였다.

 재윤아, 밥은 먹었냐?

 재윤이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재윤이의 머리를 노인이 쥐어박았다. 나는 재윤이를 앞세워 요기가 될 만한 것들을 전자레인지에 덥혀 내왔다. 짜장면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는 재윤이의 말이 떠올랐다. 중국집에 갈 것을, 하는 후회가 몰려왔다.

 어디가 아프냐?

 나는 자꾸 다리를 만지는 재윤이에게 물었다.

 노상 아픈 걸요. 그런데 어제는 조금 더 아팠어요. 할아버지, 내일은 병원에 갈 수 있어?

 우리 형편에 병원이 가당키나 하냐. 시간이 지나면 다 낫는다. 그나저나 선생님, 이렇게 술을 마시는 건 처음 보네요. 일찍 들어가세요.

 소주 한 병을 다 비우자 술기운이 올라왔다. 나는 일어나 노인에게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그때였다. 아얏, 하며 재윤이가 의자 밑으로 떨어졌다. 나는 얼른 재윤이를 일으켜 세웠다. 괜찮은지 묻자 재윤이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연신 뒤통수를 쓸었다.

 선생님, 어려운 부탁을 좀…. 저기 돈이 있으면 조금만…. 아무래도 내일은 저 놈을 데리고 병원에 가봐야 할 것 같아서요. 꼭 갚을 게요.

 노인은 덥석 내 손을 잡았다. 나는 지갑에서 오만 원짜리 지폐 넉 장을 꺼내 노인의 손에 쥐어주었다. 노인의 허리가 또다시 한껏 구부러졌다.

 나, 이제 백수가 되었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게 아내에게 그간의 일을 말했다. 아침에 화를 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아내는 고요하고 침착했다.

 꼭 그렇게 해야만 했어요?

 어쩌겠어. 젊은 사람이 살아보겠다고 애쓰는데…. 어차피 나는 낼 모레 퇴직인데 몇 년 일찍 나온다고 뭐가 달라지나.

 그것이 어디 퇴직하고 같아요? 당신 이미지도 그렇고, 당신한테 구상금청구가 들어올 수도 있는데… 어떻게 처리한대요?

 글쎄, 어떻게든 되겠지.

 어머니는요…? 모르는 사람들은 함부로 떠들어 댈 텐데, 어머니 귀에라도 들어가면….

 시간이 지나면 다 잊힐 일인데, 뭘…. 그런 건 차차 생각하고, 이참에 여행이나 좀 하면서 삽시다. 당신은 어디 가고 싶은 데 없나?

 지금 그런 맘 편한 소리가 나와요? 그리고 여행은 빈손으로 간대요?

 …이 상황에 할 말은 아니지만… 이제 준이 보험금도 쓰자고, 그거 묻어둔다고 준이가 살아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아내가 화를 낼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작정하고 그 말을 꺼냈다. 그러나 아내는 의외로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설마 잊은 건 아니죠? 자동차정비공업사를 한다는 친구한테 연대보증을 서줬잖아요. 직원한테 빌려주고 남은 거, 그거 벌써 통장압류 들어왔어요. 저기 문갑 위에 올려놓은 압류통지서를 못 봤어요?

 …그런가. 그러면 퇴직….

 퇴직금이 있으면 뭐해요. 만약 채무자가 못 갚아 독촉이 들어오면 당신처럼 세상에 없이 좋은 사람이 나 몰라라 하겠느냐 그 말이에요?

 아내의 말을 듣는 순간 발밑이 푹푹 꺼지는 것 같았다.

 토요일이었다. 그동안 나는 주말이면 낚시나 산행을 했고, 격주마다 동문 야구를 했다. 아내와는 한 번도 취미활동을 함께 한 적이 없었다. 내가 낚시를 가자고 하자 아내는 팔짱을 꼈다. 요즘 아내의 기분은 수시로 변했다.

 나는 리모컨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TV 채널을 돌리다 보니 메이저리그 야구 중계를 하고 있었다. 록키스와 샌디에이고의 경기였다. 2만여 명의 관중은 공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환호성을 질렀다. 하지만 이닝이 거듭될수록 경기의 긴장감은 떨어지고 있었다. 9대 1이라는 큰 스코어 차로 록키스의 승리가 거의 굳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홈팀인 샌디에이고의 9회 말 공격이 시작되었지만 관중석은 이미 파장 분위기였다. 2아웃에 주자는 1루에 있었다. 나 역시 맥이 빠져 채널을 막 돌리려던 순간이었다. 1루 주자가 2루를 향해 달렸다. 주자가 도루를 시도하는데도 록키스 선수 중 누구도 견제의 제스처를 취하지 않았다.

 그건 바로 무관심도루였다. 양 팀 선수들은 결과가 빤한 경기의 흐름을 지루하게 늘리고 있다는 듯 주자를 향해 곱지 않은 눈길을 주고 있었다. 관중석에서도 야유가 쏟아졌다. 이상한 건 록키스 관중뿐만이 아니라 샌디에이고의 관중들도 합세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문득 친구 김과 무관심도루에 대해서 말하다가 언성을 높였던 기억이 떠올랐다. 맥줏집에서였다. 우리나라 프로야구 경기에서 크게 앞서고 있는 팀 선수가 무관심도루를 시도한 게 발단이 되어 벤치 클리어링이 벌어진 날이었다.

 저런 상황에서 도루를 하는 건 매너가 아니지. 압도적인 스코어 차로 이기는 팀 선수가 도루라니….

 경기는 끝나지 않았고, 최선을 다하겠다는데 누가 그걸 비난한다는 말인가?

 에티켓의 문제지. 저건 스포츠맨십에도 어긋나는 거야.

 언젠가 휴스턴은 9대 2로 크게 앞서가다가 9회말 2사 후에 역전패를 당한 적이 있어. 도대체 에티켓을 적용해야 하는 점수 차는 구체적으로 얼마란 말인가. 이기고 있든 지고 있든 선수는 마지막까지 경기에 집중해야 하는 거 아닌가. 자네는 경기를 대충하는 게 매너라고 생각해?

 자네 말도 일리가 있네.

 내가 김의 말에 동의하는 것으로 사태는 일단락되었고, 김은 그런 내 태도를 못마땅해 했다.

 도루한 주자는 어정쩡하게 2루 베이스를 밟고 서 있었다. 관중들의 반응이 당황스러웠는지 그는 고개를 푹 숙였다. 다음 순간 이해할 수 없는 장면이 벌어졌다. 록키스 투수가 던진 공이 터무니없이 높게 떴다. 그런데 샌디에이고 타자는 방망이를 크게 휘둘러 헛스윙으로 삼진아웃이 되었다. 그건 아무리 선구안이 엉망인 타자라도 스윙을 할 공이 아니었다. 마치 무관심도루를 감행한 동료선수를 대신해서 사과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경기는 끝났다. 아무도 2루에 있던 주자를 격려하지 않았다. 쓸쓸히 퇴장하는 주자를 비추던 카메라도 곧바로 관중석을 향했다. 아주 짧은 순간 내가 화면 밖으로 내던져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저… 누구세요?

 아내였다. 아내는 잔뜩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이봐….

 이봐, 라니요? 누구신데 당신은 가끔 내 집에 와서 내 남편하고 똑같은 얼굴을 하고 우리 그이처럼 구는 거예요?

 이 사람이… 왜 이래? 나야 나, 당신 남편!

 당신이 내 남편이라고요? 거짓말하지 마세요. 그렇게 똑같이 분장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어요? 내 남편은 지금 집에 없어요. 봐요. 저기 낚싯대, 야구글러브, 등산 스틱… 남편은 오늘 저것들 중 하나를 들고 이미 밖으로 나갔다고요.

 이봐, 정신 차려! 잘 보라고. 자, 이것들이 모두 제자리에 있는데 내가 뭘 갖고 어딜 갔다는 거야?

 아내는 내 취미 도구들을 찬찬히 살폈다.

 그렇다면, 혹시 당신이 내 남편을 납치한 건가요?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그래요. 당신이 내 남편을 납치했든 감금했든 상관없어요. 그런 일을 당하고도 줏대 없이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단번에 체념을 하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이봐, 정신 좀 차려!

 나는 아내의 어깨를 흔들었다.

 이봐! 이봐! 이봐! …지긋지긋해! 당신이 도대체 뭔데 내 남편처럼 구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은… 이봐, 아니… 아무튼 당신이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어. 생각 좀 해보라구. 내가 남들처럼 바람을 피웠어, 노름을 했어? 나는 짜증을 내거나 당신을 귀찮게 한 적도, 하물며 준이 일로 당신을 원망한 적도 없는 사람이야. 당신이 뭘 하든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당신 편해지라고 말이야. 솔직히 나한테 무슨 낙이 있겠어. 남들 다 키우는 자식이 있나, 그렇다고 당신이 살갑게 굴기를 하나, 이 집에 들어오면 얼마나 숨통이 막히는 줄 알아? 그런데도 당신에게 좋은 남편이 되려고,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나도 노력했어. 그런데 나한테 왜 이래?

 …당신 아내도 꽤나 힘들겠군요.

 아내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팔짱을 낀 채 거실을 서성거렸다. 마치 무대 위에 선 모노드라마 배우 같았다. 문득 아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동안 아내가 내게 보인 행동들이 무엇이었는지 알아보고 싶었다. 나는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옷매무새를 고쳤다. 그리고 정중한 태도를 취했다.

 저, 저기… 나 때문에 내 아내가 힘들었을 거라고 했습니까? 이런 말은 좀 그렇지만 저는 아내에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어요. 그런데 왜 그런 말을…?

 왜, 왜냐고요? 몰라서 물어요?

 예.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서요.

 예…?

 당신은 내 남편의 얼굴하고 옷만 빌린 게 아니라 그 태도까지 훔친 것처럼 닮았어요.

 아내는 지금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세계를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거실을 서성대던 아내는 전신거울 앞에 섰다. 그리고는 잠시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했다. 그 모습을 보자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아내의 증세는 훨씬 더 심각했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당장 아내를 끌고 병원이든 어디든 갈 생각이었다. 내가 팔을 잡으려고 하자 아내는 차분하게 팔을 등 뒤로 숨겼다. 그 동작이 얼마나 자연스러웠는지 마치 내가 남의 여자에게 수작을 걸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이봐요, 사기꾼 씨. 당신도 내 남편처럼 좋은 남자인 척하고 있어요. 순전히 당신 편하자고… 아닌가요? 남들은 당신을 좋은 사람이라고 하겠죠. 그런데 당신 아내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있나요?

 나는 내 아내를… 아니,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작작해요. 당신도 전천후 좋은 남자 노릇을 하는 것뿐이에요.

 그 순간 불쑥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지금 나를 변호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아버지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아버지 오입질하고 다니는 꼴 좀 봐라. 저런 건 절대 따라하지 마라. 어린 내 앞에서도 어머니는 아무 거리낌 없이 그렇게 말했다. 아버지 때문에 애먼 내 머리통에는 혹이 자주 붙었다. 아버지가 잘못할수록 그 벌은 내가 받았다. 내가 어머니 앞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착하고 예쁜 짓뿐이었다.

 집안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아버지가 무언가를 한다는 건 곧 어머니와 나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었다. 나는 차라리 아버지가 아무것도 하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사업을 벌이고 거덜 내기를 반복했다. 신앙의 힘을 빌리겠다면서 사이비 종교에 발을 들이기도 했다. 심지어는 구원을 받으려면 어쩔 수 없다면서 어머니와 나를 구타한 적도 있었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가 내조를 못한 어머니 때문이라며 대놓고 바람을 피웠다. 그 사이 적지 않은 논밭이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갔다. 그럴수록 나는 순종적인 아이가 되었다.

 중학교 2학년 때였다. 하굣길에 시장 어귀의 작부 집을 나서는 아버지를 보았다. 대낮부터 엉망으로 취해 있었다. 나는 비틀거리며 걷는 아버지의 뒤를 몰래 따랐다. 집 근처의 다리에 이르렀을 때 잰걸음으로 다가가 아버지의 등을 냅다 떠밀어버렸다. 아버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그 일로 아버지는 두 달 넘게 팔과 다리에 깁스를 해야 했는데, 그 동안은 거짓말처럼 온 집안이 평안했다.

 잘 모르겠어.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는 게 어째서 사람을 불편하게 하는지… 만약 내가 당신에게 무언가를 했다고 쳐. 무언가를 한다는 건 약점이 잡힐 여지를 만드는 것이고, 그러면

 당신은 또 그걸 빌미로 나를 증오하고 비난하겠지. …그런데 왜 당신은 나만 탓하고 있지?

 이제 보니 당신 아내도 유령과 살고 있군요. 당신 아내는 곧 폭발하고 말 거예요. 시한폭탄을 안고 있을 테니까. 사기꾼 씨…, 당신도 아직 멀었어요.
 

 카그라스 증후군…. 그 말을 발음하는 순간 입안이 서걱거렸다. 아내가 자는 동안 인터넷을 뒤적이다 아내와 비슷한 증상의 병명을 찾아냈다. 도플갱어가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보는 것이라면 카그라스는 주변 사람들이 그들과 똑같이 생긴 가면을 쓰고 있다고 믿는 것이었다. 뇌손상이나 치매 때문이라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는 병의 원인에 대해 읽다가 나는 6개월 전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생사를 넘나든 아내를 떠올렸다. 나는 아내가 우울증 약을 복용한다는 사실도 그때 알았다. 의식을 잃은 아내는 이틀 만에 깨어났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최근 아내의 행동은 나를 견제하려는 것임이 분명했다. 그 뿐이 아니라 어쩌면 그동안 아내는 전화기를 들고 자기 자신과 수다를 떨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갑자기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아들 준이의 죽음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준이가 죽은 지도 벌써 15년이 지났다. 당시 아내는 법원 사무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아내와 내가 맞벌이를 하는 형편이었기 때문에 준이는 어머니가 돌봐주셨다. 준이를 집으로 데려온 건 취학을 앞두고서였다. 적어도 일 년 정도는 부모와 정을 붙여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날 나는 당직이었다. 회식자리에서 일찍 빠져나오겠다던 아내가 늦는 사이 준이는 집 앞에서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일로 가장 펄쩍 뛴 사람은 우리 부부보다 어머니였다. 모든 비난과 책임이 아내에게 떠넘겨질 것은 뻔한 일이었다. 나는 그날의 상황을 뒤집었다. 어머니는 지금까지 그 모든 일이 나 때문에 벌어졌다고 믿고 있다.

 준이를 그토록 허망하게 잃고 나서 나는 아내와 이혼하려고 했었다. 아내를 편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차라리 무심해지는 쪽을 택했다. 그 편이 아내도 나도 숨을 쉴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늦잠이었다. 눈을 뜨고 보니 열 시가 넘어 있었다. TV를 켰다. 뉴스특보가 방영되고 있었다. 도심 한 가운데 뻥 뚫린 구덩이는 가로 2미터, 세로 5미터, 깊이 9미터 규모로 거대했다. 응급매립복구를 시행한 지 일주일 만에 같은 자리가 주저앉은 것이었다. 200톤의 토사는 도대체 어디로 쓸려갔으며, 지하에 얼마나 큰 동공이 있을 것인지에 뉴스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두통이 밀려왔다. TV를 끄자 정적이 몰려왔다. 그제야 아내가 떠올랐다. 무슨 일이 있어도 월요일에는 아내를 병원에 데려갈 작정이었다. 그건 그렇다 해도 당장 아내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아내는 보이지 않았다. 베란다 쪽은 어두웠다. 밖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실 등은 켜진 채였다. 거실은 평소처럼 깨끗했다. 전자레인지의 된장찌개 냄비에는 온기가 남아 있었다. 나는 안방으로 뛰어 들어가 옷장을 열었다. 모든 것은 그대로였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자 주방 식탁 위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어이, 이봐….

 내 목소리는 공명이 되어 돌아왔다. 거실은 거대한 동굴 같았다. 집이 너무 넓다던 아내의 말이 떠올랐다. 나는 그 말을 스물다섯 평은 좁으니 더 넓은 데로 가고 싶다는 빈정거림으로 들었다. 내가 없는 시간에는 아내에게도 동굴 같았을 집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집도 점점 깊어지는 것 같았다. 발을 디딜 때마다 발밑이 푹푹 빠졌다.

 어이, 이봐아아….

 그때였다.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아내였다. 아내는 둥근 형광등 케이스를 들고 있었다. 그제야 거실 형광등이 깜빡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아내는 들어오지도, 나가지도 못한 채 현관에 서 있었다. 그러나 이내 경계의 눈빛을 거두었다.

 또 당신이군요, 사기꾼 씨.

 아내는 머리를 가볍게 숙였다. 나는 하마터면 한껏 정중한 태도를 갖추어 그 인사를 받을 뻔했다.

 언제까지 여기 올 건가요. 당신도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텐데…. 그만 가보셔야죠.

 나는 또다시 네, 라고 대답할 뻔했다. 아내는 거실 등을 껐다. 거실은 금세 어두워졌다. 아내는 의자를 놓고 능숙하게 형광등을 갈아 끼웠다. 아내의 행동은 자연스러웠다. 나는 오도 가도 못한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의자에서 내려온 아내가 천천히 스위치를 눌렀다. 내 눈앞으로 와락, 빛이 쏟아졌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짧은 순간 나는 아내마저 놓치고 말았다.

 

◆ 당선소감

당선전화를 받았다. 문득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래서 부끄러웠다. 아직 이렇게 말짱한데, 당선이라니…!

 작가는 소설보다 더 소설적인 삶을 살았던 앙드레 말로나 조지 오웰, 가브리엘 마르케스 같은 사람이거나, 적어도 책 한 권을 만 번 넘게 읽기를 예사로 했던 독서광 김득신 정도가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나는 깐깐하고 게으르다. 미치기에는 지나치게 내 안의 경계가 또렷하다. 그렇다면 나는 그저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겠다. 하필 손을 뻗었을 때 내 손에 잡힌 소설들이 좋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 소설에 미친 사람들이 썼을 것이고, 나는 不狂한 채로 그들에게 미치는 얌체 짓을 해온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빠져들었고, 그래서 썼을 뿐이다. 다만,

 고통스러웠다.

 누가 시키지 않았으므로 힘들면 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그런데… 사람을 가장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 제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뿐이었다. 어느 소설가는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여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가 완성된다.’라고 했다. 나는 부끄럽지만 이 말에 기대려고 한다. 어떤 식으로든 나는 시작했다. 그러므로 시작하기 전보다 미력하나마 내 일부가 완성되었기를 믿고 싶다.

 부끄러움을 알게 해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 글로써 할 말 다하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 [심사평] 김병용<소설가, 전북작가회의 회장>


우리 시대의 문학, 우리들의 삶과 소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인지… 설레이는 마음으로 투고작들을 살피게 된다. 응모자들의 문학적 열정이 집중적으로 투영된 곳에 우리 삶의 진면목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올해도 매우 다양한 소재를 다룬 소설들이 출품되었다. 이 한 편의 작품을 쓰고 투고를 결정하기까지 응모자들이 통과해왔을 시간에 경의를 표한다. 기억 혹은 경험 또는 상상이 응모자들의 손에서 문자화되는 과정… 우리들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혼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현주소를 스스로 점검한다.

 딱 한 편만 뽑아야하는 신춘문예의 특성상 다양한 서사 실험을 취한 많은 작품들이 최종적으로 검토한 작품은 “굿맨”, “시급 5500원”, “호루라기를 부세요”, 세 편이었다. 응모자 모두 진지한 소설 공부의 내력이 역력했다.

 “시급 5500원”은 ‘알바생’들의 현실을 안정적으로 직시한 시선과 깔끔한 문장이 인상적이었다. 다만, 이야기의 지연이 갖는 효과를 배가하지 못 하고 마무리된 점이 아쉬웠다. “호루라기를 부세요” 또한 하루살이와도 같은 직장인의 애환을 깊이 있게 파고든 접은 높이 살만 했으나, 갈등의 양상을 내부 분열적인 차원에서만 다룬 점이 아쉬웠다.

 “굿맨”은 무엇보다 작품의 깔끔한 진행이 돋보였다. 이야기 속도의 조절이나 인물 간 관계의 설정 등에서 소설 쓰기에 관해 오랜 수련을 거친 흔적이 역력했다. 무엇보다도 실직에 처한 남편과 혼돈 속에서 인식 장애를 일으키고 있는 아내 사이에 발생하는 관계의 긴장도가 작품 끝까지 유지된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축하 말씀과 앞으로 큰 작가로 성장하길 바라는 마음 함께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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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국 2016-01-07 11:08:09
좋은 작품이다. 세상이 원하는 굿맨. 한 마디로 바른사람이다. 하지만 삶은 굿맨으로 사는 걸 허락지 않는다. 세상은 오히려 그를 이용하고 비웃는다. 어쩌면 오지랖이 넓다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런 굿맨과 인식장애를 겪는 아내의 대립. 굿맨은 한 사람의 인격적 완성을 의미할 수는 있겠지만, 이는 살붙이며 사는 아내조차 설득시킬 수 없는 비현실적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사회는 점점 어두워지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