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금슬금 톱질하세
슬금슬금 톱질하세
  • 이문수
  • 승인 2015.12.27 16: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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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에 ‘현대미술 맛보기’라는 주제로 특강을 했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는 대학 강의와 달리 온갖 얘기를 뒤범벅 해서 미술을 얘기한다. 그래서 더 신나는 모험이기도 하다. 대개 100여 분 정도 시간에 낯선 현대미술을 맛보게 하는 것이 녹록지 않기에 많은 준비를 하고, 강단에 오르면 무당이 칼 타듯 한판을 벌인다. 흥미를 끌기 위해 시답지 않은 농담도 건네고, 동영상으로 동기부여 하면서 열정을 토한다. 생활에 직접적인 보탬이 되지 않지만 익숙한 것을 낯설게, 낯선 것을 익숙하게 제시하는 현대미술을 많은 사람과 나누면서 소통하고 공감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오늘은 온갖 얘기 중 하나를 풀어 보겠다. 한국인이라면 <흥부전> 줄거리를 알 것이다. 마음씨 착하지만 가난한 흥부는 부러진 제비 다리를 정성스럽게 치료해 주고, 제비가 물어다 준 박 씨를 심었다. 주렁주렁 열린 박,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박 속으로 음식을 만들기 위해 박을 탔던 흥부는 인생역전을 한다. 박에서 나온 산해진미, 금은보화, 고래 등 같은 기와집, 하인과 노비까지. 착한 흥부는 복을 받고 욕심 많은 놀부가 벌을 받은 것도 제비가 물어다 준 박 씨 때문이다. 여기까지가 누구나 아는 <흥부전>일 것이다.

 <흥부전>은 동생의 분노와 저항이 스며 있는 작품이다. 임진왜란 이전까지는 부모 재산이 딸들에게도 골고루 나뉘었는데 전란 이후 피폐한 사회에서 가문을 잇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에 장남에게만 상속한다. 소설 속 놀부는 불법적으로 부를 축적한 게 아닌데 집안의 모든 재산을 챙긴 고약한 욕심꾸러기로 설정한 것이다. 놀부 처지에서 보면 억울하기도 하다.

 그런데 흥부는 박을 몇 개 탔을까? 정답은 4개다. 흥부가 슬금슬금 톱질해서 탄 박에서 나온 것들을 통해 인간 욕망을 들여다보자. 첫 번째 박에서는 생뚱맞게도 나무껍질과 풀뿌리가 나왔다. 이것은 귀한 약재다. 건강하게 오래 사는 소망을 담은 것. 두 번째 박에서 나온 책들은 과거 급제해서 입신양명함으로써 가문을 빛내는 바람일 것이다. 그러니까 무병장수하고 명예를 얻으라는 얘기다. 세 번째 박에서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재물들이 나왔다. 흥부 처가 불안한 마음에 ‘당신의 헛된 욕심을 유도하는 판도라 상자여서 모든 것을 빼앗아 갈 것이라고’ 극구 말린 네 번째 박에서는 무엇이 나왔을까? 흥부도 대충 감을 잡았겠지만 끝내 우겨서 탄 마지막 박에서는 절세미인 양귀비가 나왔다. 그 후로 흥부는 행복했을까? 맘대로 상상하시라.

 <흥부전>의 네 개 박은 그렇다 치고, 사람은 밥만 먹고 살 수 없으니까 지금부터 우리는 어떤 박을 만들어서 타야 할까. 낯설고 생소하지만 알고 보면 상당히 매력적인 박이 있다. ‘현대미술의 박’이다. 현대미술 속에는 삶의 지표를 찾아가는 데 필요한 자유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끊임없이 물음을 던지고 스스로 그 답을 찾아가는 여정에 있다. 정답도 없고 스승도 없다.

 아서 단토의 <예술의 종말 이후>라는 책이 있다. 예술의 종말이라는 테제는 철학적 미술사라 불릴 만하며, 혼란스럽게 보이는 현대미술에 어떤 이해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깃든 역작이다. 하지만 읽기 어려운 책이기도 하다. 1964년 4월, 아서 단토는 앤디 워홀이 뉴욕의 스테이블 갤러리에서 <브릴로 상자>를 작품으로 제시한 것을 보고 ‘예술의 종말’을 얘기했다. 이 말뜻은 지금까지 존재해온 어떤 개념으로도 워홀 이후 현대미술 작품들의 의미를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임제 선사 말처럼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나한을 만나면 나한을,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하는’ 엄중한 승부사가 현대미술가다. 위대한 예술가가 암벽일 수 있고, 심오한 비평가가 태풍일 수 있으며, 해박한 스승이 사나운 파도일 수 있다. 현대미술은 이런 치열함 속에서 변화하고 있다. 현대미술은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세상을 다른 각도에서 해석해보라고 이끈다. 새로운 세상은 늘 그렇게 낯설게 다가오니까. 우리는 현대미술을 통해 ‘나와 세상과 관계 맺기’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이문수<전북도립미술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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