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과 사법부의 독립
민족과 사법부의 독립
  • 권익산
  • 승인 2015.12.24 15:1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만의 영구 집권을 위해 소위 사사오입 개헌이 이루어지자“절차를 밟아 개정된 법률이라도 그 내용이 헌법 정신에 위배되면 국민은 입법부의 반성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공개적으로 비판한 대법원장 김병로는 자신을 몰아내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이 사표를 요구하자 “이의 있으면 항소하시오”라는 말로 거부했다는 일화 때문에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으로 법치주의의 기틀을 만들었고, 이승만의 독재에 맞선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그의 대쪽 같은 법조인의 모습이 하루아침에 만들어 진 것이 아니었다.

1887년 순창에서 외아들로 태어난 그는 어린 시절 간재 전우의 문하에서 한학을 배웠고,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최익현이 태인의병을 일으키자 스무 살의 나이에 자기 돈을 들여 포수를 모집하고 의병에 참여하였다. 순창의 일본인보좌청을 습격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지만 의병은 해산되고, 최익현은 대마도로 끌려갔다. 그 후 선생은 당시 신학문의 요람이었던 담양의 창흥의숙에 다니면서 새로운 세상에 눈을 떴다.

이후 일본으로 유학한 그는 일제의 박해를 받아 비참한 질곡에 신음하는 동포를 위하여 도움이 되기 위하여 법률을 공부하였다.

일본 유학에서 돌아 온 그는 1919년 변호사를 개업하고 본격적으로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맡은 사건은 보합단 사건, 의열단원 김상옥 의거, 6.10만세운동, 조선공산당 사건, 옥구농민항쟁 사건, 원산총파업 사건, 광주학생항일운동 사건, 흥사단 사건 등 굵직굵직한 독립운동가의 재판에 참여하여 무료로 변론하였으며, 남겨진 가족들을 돌보기도 하였다.

1927년 군산 이엽사 농장의 일본인 지주가 소작료를 75%로 올리자 이에 항의 하는 농민운동이 벌어졌다. 소작료를 낮춰 달라고 요구하는 농민들을 사상범으로 몰아 치안유지법으로 처벌하려고 하자 선생은“조선 민중에 관한 형사 범죄 사건을 보면 그 태반이 사상범이나 정치범이니 이것을 근본적으로 해결치 아니하고 경찰의 폭압으로 대하고 다음 형사 재판에 부쳐 그것을 해결코자 하니 뒤집어 생각하여 보면 민중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는 것은 실로 경찰이다”라고 하여 사건의 원인이 일제의 식민지배와 가혹한 수탈 때문이라는 점을 밝혔다.

선생은 독립운동가들을 무료로 변론하는 한편 그 자신이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민립대학설립운동에는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좌우연합의 민족운동 단체인 신간회의 중앙집행위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이러한 선생의 왕성한 활동은 변호사 생활을 어렵게 하였고 결국 십여년간의 변호사 생활을 접고 일제의 탄압을 피해 시골에 칩거할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자 선생은 새로운 국가 건설에 참여하였다. 그가 우익 정당인 한국민주당에 참여하면서도 토지 개혁을 강력히 주장한 것은 일제강점기 농민운동을 변호하면서 농민들의 비참한 실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또한 분단을 막기 위한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에도 관심을 가졌다.

그런 선생이었기에 반민특위가 결성되자 재판부장을 맡아 친일파 처벌에 앞장 선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으며, 반민특위가 와해되고 이승만의 독재로 의회가 무력화되고 삼권분립이 위협받자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기 위해 이승만에 맞선 것 또한 그의 삶에서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

평생을 민족의 독립과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살아간 김병로가 이승만과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대법관의 임기를 끝까지 마칠 수 있었던 데에는 부정을 행하기보다는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이 영광이라는 그의 평소 지론을 엄격히 지켜왔기 때문이기도 하다. 추운 겨울날 초등학교 2학년인 손자를 태워준 운전기사에게 ‘이 차가 대법원장 차지, 손자 차인가’라고 호통을 쳤다는 일화는 그가 평생 지키며 살았던 삶의 자세를 보여 준다.

“법관이 국민으로부터 의심을 받게 된다면 최대 명예손상이 될 것이다. 정의를 위해 굶어 죽는 것이 부정을 범하는 것보다 수만 배 명예롭다. 법관은 최후까지 오직 정의의 변호사가 되어야 한다.”

가인 김병로 선생이 대법원장에서 퇴임하면서 남긴 이 말은 평생 독립을 위해 살았으며, 자유롭고 민주적인 대한민국을 세우려 했던 그가 물질적인 면에서 훨씬 풍족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일지도 모른다.

  
   권익산 원광고 교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